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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22

너와 나의 유니버스

각자의 상상력을 시각화한 두 천재,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과 팀 버튼.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Zoom’, 2020. Courtesy of Gagosian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Les Meninas II’, 2001. Courtesy of Gagosian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Untitled(with tennis ball)’, 2020. Courtesy of Gagosian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수한 유니버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개념의 멀티버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는 무수한 유니버스가 등장한다. 나와 닮은 내가 있고, 우리의 꿈은 다른 유니버스의 내 모습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객이 다른 유니버스 개념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메타버스 역시 멀티버스 같은 개념이다. 유저가 메타버스라는 디지털 공간이 현실의 대체제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메타버스도 현실이 된다. 과거 인터넷이 그랬던 것처럼. 메타버스와 멀티버스에 눈이 익은 우리는 이미 눈에 보이는 사물 너머의 사물을 인식하는 데 익숙해졌다. 현실의 거리를 걷고 있지만, 우리 눈엔 보이지 않는 전파 네트워크로 메타버스의 데이터가 오간다는 개념을 더는 신기해하지 않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지구 616에서 지구 838로 이동해 흑화한 스칼렛 위치와 싸우는 영화적 개념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인다.
어쩌면 이 모든 건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의 개념 미술 작품 ‘참나무’(1973)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마르셀 뒤샹과 함께 미술 개념을 뒤집었다. 마르셀 뒤샹은 남성 소변기에 ‘파운틴’이라는 제목을 달았고,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선반 위에 물잔을 올려놓은 뒤 ‘참나무’라고 불렀다. 물론 물잔이 참나무일 리가 없다. 그런데 예술가가 물잔을 참나무라고 일컫는 순간 관람객은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에 의문을 갖는다. 의문은 상상력을 낳고, 상상력은 물잔이라는 개념을 뒤흔든다. 어떤 상상이든 상관없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물컵에 대한 개념이 뒤집히기 때문이다.
8월 28일까지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展>은 21세기 유니버스의 시작점을 보여주는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의 회고전이다. 아시아 최초로 ‘참나무’도 직관할 수 있다. 인식의 개념만 조금 확장하면 닥터 스트레인지의 비행 망토가 보일지도 모른다. 그의 예술적 목적은 일상의 평범한 것을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현실의 재해석이야말로 개념 미술의 핵심이다. 관람객이 일상에 순응하지 않고 반항하게 만드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안다면 더는 보이는 대로 살지 않게 된다. 1970년대 팽배했던 반문화는 개념 미술의 토양이었다. 흔히 마르셀 뒤샹과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을 ‘미술 교과서 마지막 페이지이자 현대미술의 첫 페이지’라 일컫는 이유다. 미술 교과서는 우리가 세상을 보이는 대로 믿도록 가르친다. 현대미술은 우리가 보는 세상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고 속삭인다. 세상에 대한 개념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그의 말처럼 세계는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회고전에선 일단 작품의 압도적 크기에 눈길을 빼앗긴다. 로비에서부터 벽을 가득 채운 대형 작품으로 시작된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1990년대부터 팝아트적 회화 작품을 선보여왔다. 대상은 주로 사물이다. 노트북이나 테이프리코더, 헤드폰, 스타벅스 컵 같은 일상적 소재가 등장한다. 색은 단순하고 선은 간결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크기다. 대부분 2m가 넘는 큰 스케일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사물이 압도적 크기에 강렬한 색채로 둔갑해 다가오는 것이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이 노리는 건 분명하다. 일상적 사물을 새로운 개념으로 바라보는 경험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손에 든 스마트폰이 2m 크기의 형광색 그림으로 변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압도적 비주얼화는 21세기 관람객한테는 익숙하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4D로 봤거나 <인터스텔라>를 아이맥스로 본 관객이라면 아주 약간의 상상력만으로도 현실 개념이 뒤흔들리는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다는 걸 안다. 이렇게 21세기의 상업화된 엔터테인먼트는 ‘참나무’와 달리 비주얼과 스토리 그리고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멀티버스를 쉽게 경험하게 해준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회고전은 21세기가 그에게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더 월드 오브 팀 버튼>전 전경.
<더 월드 오브 팀 버튼>전 전경.
팀 버튼, ‘Untitled(Vincent)’, 1982. ⓒTim Burton


21세기에 우리가 만끽하는 대혼돈의 개념을 위해선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말고 다른 것도 필요했다. 개념에 생명을 불어넣는 캐릭터와 스토리의 디테일이 그것이다. 이건 또 다른 상상력의 영역이다. 무엇인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구체화하는 건 다르다. 다른 세계를 인식하는 것과 다른 세계를 그려내는 것의 차이다. DDP에서 9월 12일까지 열리는 〈더 월드 오브 팀 버튼〉은 다른 세계를 그려낸 아티스트 팀 버튼의 50년 발자취를 모아놓은 메타버스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이 멀티버스의 존재를 관람객 스스로 상상하도록 만드는 아티스트라면, 팀 버튼은 자신이 상상한 멀티버스를 현실 세계로 불러내는 데 평생을 바친 아티스트다. 예술은 ‘얼마나 세상을 똑같이 모방하는가’에서 ‘어떻게 세상을 비판하는가’로, 다시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진화했다. 팀 버튼은 지난 50년 동안 언제나 멀티버스의 최전선에 있었다. 팀 버튼은 영화감독이지만, 그의 예술 세계는 영화를 넘어 미술과 건축, 의상과 음악까지 확장된다. 그가 영화 연출가가 아니라 유니버스 크리에이션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10개 섹션으로 구성한 <더 월드 오브 팀 버튼>에선 어린 시절 팀 버튼에게 영향을 미친 작품부터 그가 창조한 캐릭터의 기원, 그리고 아직 발표하지 않은 작품의 밑그림까지 팀 버튼 월드의 천지창조 과정을 모두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섹션은 세 번째 섹션 ‘카니발레스크’와 다섯 번째 섹션 ‘오해받는 낙오자’다. 그는 데뷔작 <피위의 대모험>부터 출세작 <가위손>, <찰리와 초콜릿 공장>까지 시종일관 두 가지 모순된 세계와 감정과 인물의 충돌을 그려왔다. 그의 세계에서 괴물은 두렵지만 안쓰럽다. 세상은 축제 같지만 공포스럽다. 인물들은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린다. 팀 버튼은 보이는 외형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는 감정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말하기 위해 평생을 보냈다. 이런 이중 개념은 정작 그걸 느끼는 사람한텐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보이는 걸 믿지 않고 보이지 않는 걸 느끼는 자는 외롭다. 영원한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이다. 전시 마지막 섹션인 팀 버튼 작업실이 천재적이지만 고독하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미술관은 일상에서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다. 마이클 크레이크 마틴은 ‘참나무’로 미술관에 포털을 열며, 현실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반면, 팀 버튼은 <가위손>으로 현실 개념을 다르게 인식하는 자의 모습을 그려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언제나.

 

에디터 박이현(hyonism@noblesse.com)
신기주(북저널리즘 콘텐츠 총괄이사)
이미지 제공 UNC, GNC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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