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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1

SLOW BUT STEADY

건축가 구마 겐고의 ‘약한 건축’이 지속 가능한 삶을 추구하는 흐름 속에서 주목받고 있다.

2022년 문을 연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하얏트 센트릭 호텔.

자연에서 얻고, 자연에 되돌려주는 건축
“일본 건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축가는?”이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아마 대부분 안도 다다오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노출 콘크리트에 빛과 그림자, 물이 빚어낸 자연의 숨결을 불어넣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도시 생활에 찌든 우리에게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선사하기 때문. 우리나라만 봐도 강원도 뮤지엄 산이 그렇고, 서울 JCC 아트센터·LG 아트센터, 제주도 본태박물관이 그렇다. 기실 건축에 관심이 많다면 안도 다다오만이 일본 건축의 전부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을 터. 이소자키 아라타, 단게 겐조, 반 시게루, 이토 도요 등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일본 건축가만 무려 여덟 명이다. 전문가들은 일본 건축의 약진 비결로 일찍이 다진 국제 네트워킹, 지진 탓에 고층 아파트가 적어 건설사가 많은 점, 뛰어난 시공 품질을 꼽는다. 그야말로 다양한 시도가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
구마 겐고(Kengo Kuma) 역시 세계 건축계에서 손꼽히는 일본 건축가다. 위에 말한 인물처럼 프리츠커상을 거머쥐진 못했지만, 이에 버금가는 이력을 자랑한다. 2021년 미국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2018 밀라노 디자인 위크’ 다쏘시스템(Dassault Systemes) 전시에 아트워크 출품, 2020 도쿄 올림픽 주 경기장·산토리 미술관·아사쿠사 문화 관광 안내 센터·와세다 대학교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후쿠오카 스타벅스·부산 롯데타워·춘천 네이버 데이터 센터 등의 설계가 대표적이다. 더욱이 얼마 전에는 펜디와 협업한 피카부·바게트 소프트 트렁크를 공개했다. 이렇듯 그의 손길로 탄생한 건축물이나 브랜드 협업 제품과 마주하면 “와!”라는 짧은 탄성이 절로 나온다. 단순한 설명으로, ‘명징’과 ‘직조’로 소개되는 안도 다다오와 달리 구마 겐고의 건축은 기하학적이면서 기하학적이지 않다. 즉 명확한 언어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의미. 흥미롭게도 구마 겐고는 단게 겐조의 국립 요요기 경기장에서 영감을 받아 건축에 입문했는데, 그의 작품은 르코르뷔지에·단게 겐조·안도 다다오를 잇는 브루털리즘(brutalism, 기능주의로 복귀를 선언하며 거친 재료 이용)과 거리가 멀어 눈길을 끈다.







펜디와 협업한 구마 겐고. © FENDI
2023년 펜디와 협업해 탄생한 가방과 신발. 구마 겐고의 건축 스타일을 반영했다. © FENDI
2021년 안토니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Casa Batllo) 계단을 구마 겐고가 다시 디자인했다.


“처음부터 왠지 콘크리트에 거부감이 있었어요. 질감, 무게감, 딱딱함, 차가움 등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죠. 결정적으로 콘크리트는 한 번 사용하면 더는 변형과 재활용이 불가능하잖아요. 그래서 건축에 조연으로 삼는 것은 좋으나, 콘크리트가 주연인 브루털리즘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재료의 장점은 있어요. 강도가 요구되는 건축에서 콘크리트는 필수 불가결한 재료니까요. 그래도 콘크리트를 제 건축 표현 중심에 놓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색합니다.” 문득 안도 다다오의 청년 시절 작업 이야기가 뇌리를 스친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건물 내부와 외부를 일체로 만드는 경제성에 끌려 콘크리트를 선택했다. 그러다 지나고 보니 건물을 다양한 표정으로 만들 수 있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와 나무와 종이 건축에 익숙한 일본인 미의식에 부응하는 섬세한 콘크리트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반면, 구마 겐고는 나무와 돌, 종이 등을 활용하는 ‘약한 건축’을 지향한다. 약한 건축은 자연 친화적 재료로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물을 완성하는 데 의의가 있다. 지난해 리움미술관에서 개최한 그의 강연을 인용하면, 철과 콘크리트로 만든 ‘강한 건축’은 30년 전엔 ‘발전의 상징’으로 인식됐지만, 환경오염이 생존 문제가 된 오늘날은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쓰고, 자연에 되돌려주는 ‘약한 건축’의 시대다. 특히 구마 겐고의 건축은 나무를 촘촘히 엮는 것이 인상적인데, 이를 통해 제작한 루버, 격자, 면을 보면 건축물 실내·외가 연결되는 착각에 빠진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나무에 집중했어요. 제 손길이 닿은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토록 인간과 건축이 나약하다니…’라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당시 제게 위안을 준 건 유년 시절을 보낸 동네의 기억이었어요. 그곳에서 주변 환경과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나무 같은 자연 소재와 최신 기술을 결합하면 재해에 강한 건물을 만들 수 있어요. 제 건축에서 나무 구조물은 지진 충격을 줄여주는 역할을 해요. 하지만 나무를 모든 건축에 적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진 않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장소’에 뿌리를 둔 건축이에요. 그것이 ‘자연스러운’ 건축이죠. 일하면서, 여행을 다니면서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존재를 발견할 때마다 늘 경이로운데요. 그 땅의 기후, 문화, 자원은 당연히 그곳에서 설계되는 건축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위쪽 1995년 준공된 일본 시즈오카 레지던스 Water/Glass House. © Masao Nishikawa
아래쪽 2011년 진행한 일본 후쿠오카 스타벅스 인테리어 프로젝트. © Mitsumasa Fujitsuka

작고, 낮고, 느리게
다시 서두에서 언급한 구마 겐고의 이력을 톺아보자. 건축, 브랜드 협업, 아트워크 등 넓은 활동 반경이 놀랍지 아니한가. 곰곰이 살펴보니 이들 사이엔 ‘친환경’이라는 큰 맥락이 있다. 건축은 자연 친화적 재료를, 펜디와의 협업은 일본 전통 수제 종이 와시·대나무·자작나무 껍질을 이용했고, 아트워크는 오염 물질을 흡수하고 정화하는 섬유로 제작했다. 결과물만 보면 우리의 하루를 친환경적으로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 “무슨 일이든 일상을 친환경적으로 디자인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자연과 공예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서 제 작업의 중심을 이루죠. 예로, 펜디에서 가방과 신발을 제작해달라고 의뢰했을 때 저는 그것이 작은 건축 프로젝트라고 판단했습니다. 펜디의 시그너처 아이템을 디자인함으로써 제가 사랑하는 일본 종이 와시의 매력과 일본의 장인정신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어요.” ‘코로나19 이후 디자인과 건축’을 주제로 한 대담에서 구마 겐고는 “건축가는 사회의 OS(Operating System, 운영체제)를 만드는 일을 한다. 인간 생활, 사회의 기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건축가의 주 업무로, 이전까지 좇던 ‘상자의 OS’를 부정하고 새로운 OS를 만들 의무가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표면적으로는 시스템을 전복하겠다는 뉘앙스다. 그런데 그동안 구마 겐고의 활동을 보면 이 발언은 기존 것을 수정·보완한다는 게 정확한 뜻일 것이다. “옳은 지적이에요. 인류가 농사를 지으면서 고정된 영역을 만들었고, 이러한 영역에 틀이 올라가면서 도시가 되었어요. 나아가 도시에 모든 것이 몰리면서 공고한 틀이 세워졌습니다. 마치 상자처럼요. 상자 안은 포화 상태라 숨 쉴 공간이 부족해요. 에어컨에 의지할 뿐이죠. 인간의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전환되지 않아요. 사람의 행동도 마찬가지고요. 새로운 시스템(OS)은 서서히 시간을 두고 침투하는 것입니다. 제가 자연 친화적 재료를 쓰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죠. ‘단번에 뒤집는 일은 현실적으로 안 되고,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면 자연스레 역사는 달라질 것’이라는 관점에서 건축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논의된 내용이지만, 코로나19가 기폭제가 되었어요.”
여기서 의문점 하나. 왜 사회의 OS는 ‘안 좋은 일’이 발생했을 때 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일까. 정녕 미리 준비할 수는 없는 걸까. “본디 인간은 게으른 습성이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스스로 변화하려고 하지 않아요. 역사적으로도 인류의 전환은 큰 재난을 겪은 뒤 이루어졌어요. 그럼에도 과거를 반면교사 삼아 점점 현명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이 그 예죠. 환경 변화가 심각한 피해를 가져온다는 것,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미래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구마 겐고의 건축 바탕에는 나무와 나무를 짜 맞추는 기술 ‘기구미’가 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일본 나무를 해외에서 조립하기 위해 연구한 기술이 이제는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어떠한 외부 자극에도 버틸 수 있는 끈끈함이 느껴지는 구조는 흡사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묘사한 듯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공동체’라는 가치는 점점 신기루처럼 변하는 모양새다. 마지막으로 건축, 디자인, 사회 시스템 등 여러 방면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구마 겐고에게 다가올 우리 삶과 건축에 관해 물었다.
“만약 가속페달이 더해진 산업화만을 정상적 사회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거예요. 크고, 높고, 빠른 것을 우선시하면 최근 우리를 고통에 빠지게 한 상황이 반복될지도 모릅니다. 지난 몇 년간 계속 대량생산, 산업화, 우상향하는 사회는 영원히 지속할 수 없음을 목격했잖아요. 작고, 낮고, 느린 ‘삼저(三低)’의 발상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당장 직면한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가령 고령화사회에서 노년의 삶을 잘 보내려면 도시에 기억이 남아 있어야 하듯이요.”

 

에디터 박이현(hyonism@noblesse.com)
사진 KKAA, 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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