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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28

순정을 찾아서

문화 칼럼니스트 정준호가 전하는 이탈리아 베로나와 베네치아의 <라 트라비아타>.

2026년 동계 올림픽 개최 예정인 돌로미티 코르티나담페초 산정.

베로나의 <라 트라비아타>
2023년 100주년을 맞은 베로나 아레나(Arena di Verona) 오페라 축제의 마지막 날인 9월 9일 토요일. 이런 날 술이 빠지면 멋없다. 포도 수확을 늦춰 나무에서 수분을 말려 당도를 높인 뒤 발효한 아마로네(Amarone) 와인은 베네토(Veneto) 지방의 특산품이다. 늦여름 작열하던 태양의 숨결을 품은 듯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에 이 와인을 좋아하던 위대한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를 떠올린다. 그녀는 100년 전에 태어나 1947년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무대를 통해 혜성처럼 세상에 모습을 알렸다. 5년 뒤인 1952년에 베로나는 칼라스에게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대표작 <라 트라비아타> 주역을 맡겼다. 그로부터 71년 만인 지난해, 베로나 축제의 마지막 무대에서 안나 네트렙코(Anna Netrebko)가 같은 역할로 대미를 장식했다.
베로나 아레나의 명물 중 하나는 공연 전 울리는 징이다. 공연 당일이면 무대에 설 법한 복장의 미녀가 세 차례 징을 치며 막이 오를 시간이 다가옴을 알린다. 장내 안내 방송에서 출연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비올레타 발레리 역에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라는 말과 함께 수천 명의 환성이 터져 나왔다. 복싱 경기장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왜 아니겠는가? 이곳은 고대 로마에서 검투사들이 겨루던 아레나가 아닌가. 아레나는 검투사의 피를 덮던 ‘모래’라는 뜻에서 온 말이다. 네트렙코 역시 음악 외에도 정치적 이유로 세상과 피 튀기듯 투쟁하던 이다. 그녀는 좋고 싫음을 떠나 젊은 시절 준수한 용모로 많은 점수를 받았지만, 점차 연륜을 쌓고 체중을 불리면서 자신의 존재감은 얼굴이 아닌 밀도 높은 음성과 극적인 표현력에 있음을 증명했다. 이날 공연을 본 사람들은 네트렙코에게서 살아 있는 칼라스의 음성을 발견했다.
지난달에 연재한 기사에서 보았듯 <아이다>는 현대적 연출에 공을 들인 탓에 찬반이 갈렸다. 한편 마지막 공연 <라 트라비아타>는 프란코 체피렐리(Franco Zeffirelli)가 생전 연출했던 고전적 무대를 재연한 것이었다. 그는 칼라스와 동갑으로 그녀의 탄생 100주년을 기렸다. 체피렐리는 그의 멘토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가 영화 <무고한 존재>에서 묘사한 것처럼 파리의 향락을 아레나에 그대로 펼쳐 보였다. 광활한 무대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은 없었으며, 어느 부분을 봐도 인물의 들고남과 어우러짐은 짜임새 있었다.
오페라는 호흡이 긴 예술이다. 작품 길이만 두 시간이 훌쩍 넘는 데다 네 시간가량 되는 작품도 있기에 막간 휴식까지 치면 네다섯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출연진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엄청난 집중력과 체력을 요구하는 예술이기에 대중성에 기댈 수밖에 없던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앞부분에 사활을 걸었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가 압도적 액션으로 시작을 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이다>는 초반부 ‘청아한 아이다’, ‘이기고 돌아오라’, ‘개선 행진곡’ 같은 곡으로 관객을 열광케 한다. 실제로 ‘개선 행진곡’이 끝나고 집에 가는 사람도 많다. 같은 맥락에서 <라 트라비아타>도 ‘축배의 노래’, ‘아, 그이였던가!’, ‘프로벤차 내 고향’ 같은 불멸의 히트곡으로 전반을 마무리한다. 하나 베르디 같은 거장이 앞부분에 힘을 다 쏟아붓고 뒷부분은 그저 졸음과 인내심에 맡겼을까? <라 트라비아타>의 참맛은 후반부에서 시작된다. 우선 앞부분부터 살펴보자.





베네치아 운하 북쪽에 위치한 명사들의 묘지섬, 산미켈레.

화류계의 꽃이던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순수한 사랑에 감동해 그간의 방탕한 생활을 접고 교외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알프레도의 아버지가 그녀를 찾아와 창부와 아들의 사랑은 결혼을 앞둔 자신의 딸과 가문의 이름에 누가 되니, 아들에게서 떠나달라고 무례하게 요구한다. 비올레타는 애인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하며 마음이 변했다는 편지만 남긴 채 파리로 떠난다. 그녀의 속마음을 모르는 알프레도는 분노한다.
이어지는 2막 2장의 시작은 누가 들어도 발레 음악이었다. 밀라노 라 스칼라(La Scala)의 프리마 발레리나 니콜레타 만니(Nicoletta Manni)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집시 무희를 이끌었다. 샴페인과 아마로네로 몽롱하던 아레나에 청량감이 가득 차는 듯했다.
다시 예전 삶으로 돌아간 비올레타와 그녀에게 화가 난 알프레도가 파티장에서 마주친다. 알프레도는 창부에게 어울리는 것이라며 카드에서 딴 돈을 비올레타에게 던진다. 비올레타는 속이 타는 듯한 슬픔을 독백하듯 노래 부르고 하객은 알프레도의 잔인함을 비난한다. 비올레타의 진심을 안 알프레도의 아버지마저 아들의 경솔함을 꾸짖자 그제야 그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며 뉘우친다.
2막의 파국은 내가 <라 트라비아타>에서 가장 숨죽이며 보는 장면이다. 진정 이 오페라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이 부분부터가 핵심임에 공감할 것이다. 심지어 평소 서곡에 별로 공들이지 않는 베르디지만 이 작품만큼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전주곡으로 뒤에 올 슬픈 사랑의 결말을 예고했다. 네트렙코, 알프레도 역을 맡은 신성 테너 프레디 데 톰마소(Freddie de Tommaso), 알프레도의 아버지를 열창한 라 스칼라의 베테랑 루카 살시(Luca Salsi)의 앙상블은 베로나의 합창과 어우러져 머리털을 쭈뼛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체피렐리가 연출한 베로나 <라 트라비아타> 2막 파국의 피날레. © Fondazione Arena di Verona
두 번의 화재 후 2003년 재개관한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베네치아의 순정
베로나의 마지막 밤을 남은 아마로네 와인을 마시며 보내고, 이튿날 베네치아로 향했다. 라 페니체(La Fenice) 극장에서 같은 <라 트라비아타>로 새 시즌을 열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이 1853년 초연된 장소가 바로 라 페니체다. 100년 된 베로나와는 또 다른 책임감이 필요한 장소다. 1792년에 문을 연 이곳은 1836년 화재로 파괴된 뒤 이듬해 재개관했으나 1996년에 또다시 복구 불가할 정도로 전부 타버려 안타까움을 샀다. 그러나 1954년 비스콘티가 극장 내부를 꼼꼼하게 포착한 영화 <애증(Senso)>을 남긴 덕에 2003년 가까스로 복원된 불사조 극장이 세 번째로 문을 열었다. 이듬해 재개관 첫 작품은 당연히 <라 트라비아타>였다.
캐나다 출신 로버트 카슨(Robert Carsen)은 체피렐리 못지않은 오페라 연출의 대가다. 다만 그의 스타일은 베로나의 정통 무대와는 반대다. 베로나의 경우 큰 무대를 채우는 것이 과제라면, 베네치아는 작은 무대를 알차게 쓰는 아이디어가 관건이다. 어쩌면 카슨에게 어느 시대 옷을 입힐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라 트라비아타>가 본질적으로 돈과 사랑의 거래라는 문제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가 시종일관 배경 삼은 울창한 숲에선 지폐가 끊임없이 떨어지고, 2막 2장의 파티가 열리는 무대를 보드빌 극장(극장식 카바레)으로 그린 것은 오페라 예술 자체에 대한 풍자다.
<라 트라비아타> 원작인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fils)의 소설은 사실 ‘축배의 노래’를 부르는 파티가 아니라 여주인공이 죽은 뒤 그의 빚을 청산하려고 사치품을 경매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나는 카슨의 무대에 뿌려지는 지폐가 오페라, 라 페니체, 나아가 베네치아에 뿌려지는 돈이라고 생각했다. 1000년의 세월 동안 강소국으로 독보적 문화를 창조했던 베네치아지만 지난 세기 이래 결국 경매시장에 나온 매물이 되고 만 것 아닐까? 매춘부였던 비올레타가 죽을 때까지 순수한 사랑을 잃지 않고 간직했다면, 베네치아가 간직한 ‘순정(純情)’은 어떤 것인가? 물의 도시를 사랑하고, 또 이 많은 것을 빚진 이로서 남의 고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높은 곳에 올라야 한다. 다음 날 나는 돌로미티로 향했다.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 접경을 이루는 알프스 지역이자 <핑크 팬더>, <클리프행어> 같은 영화 촬영지로 잘 알려진 장소다. 나에게는 만년의 구스타프 말러가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던 곳으로 뜻깊은 장소다. 투명한 호수에 비친 만년설에 때 묻지 않은 ‘순정(純正)’ 베네치아가 박혀 있을까? 내가 산에서 주운 돌 이름은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프란체스코 카발리(Francesco Cavalli)’ 같은 것들이다. 다음 달에는 이 원석을 가공해 베네치아에 걸맞게 세팅해볼 예정이다.





위쪽 베로나 <라 트라비아타> 2막에서 열연하는 안나 네트렙코와 루카 살시. © Fondazione Arena di Verona
아래쪽 베네치아 <라 트라비아타> 1막 중 낙엽처럼 지폐가 떨어지는 향락의 파티. © Roberto Moro

 

에디터 김혜원(haewon@noblesse.com)
글·사진 정준호(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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