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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07

VIVID VIVALDI

비발디의 선율은 세기를 관통해 아름답게 흐른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이 보석이 제대로 빛을 발 하기까지 그 지난한 여정에 대하여.

아카데미아 다리에서 본 살루테 성당. 양 끝에 바르바로 궁전과 콘타리니 폴리냐크 궁전이 마주 보고 있다.

베네치아 본섬의 중심부를 벗어나 옛 조선소와 비엔날레가 개최되는 공원 쪽으로 가다 보면 부둣가에 피에타 교회(Chiesa della Pieta)가 보인다. 바로크 시대에 붉은 머리카락의 사제(司祭)가 이곳에서 보육원 여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사계(Le quattro stagioni)>를 작곡한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다. 천변만화하는 멜로디는 그가 직접 쓴 소네트와 상응해 듣는 이의 공감각을 증폭시킨다. 타원형 예배당 천장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가 그린, 같은 모양의 프레스코화가 구석의 십자가상과 비발디의 두상을 내려다본다.

200년간 주목받지 못한 비발디
<사계>는 1939년에 첫 음반이 나온 뒤 이따금 녹음이 이어지다가 1955년 이무지치(I Musici) 앙상블의 앨범이 발매되면서 일약 클래식 음악의 대명사로 부상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에서 나이절 케네디(Nigel Kennedy)까지 숱한 음반이 시대를 풍미했고, 2011년에 이미 천 번 넘게 녹음되었으며, 누적 판매량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 비발디는 그의 시대 이래 계속해서 사랑받아왔을까? 일단 첫 녹음이 1939년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녹음 기술의 탄생 이후로도 사반세기 이상 이 곡이 잊혔음을 의미한다. 오페라나 교향곡처럼 길이가 훨씬 긴 곡도 이미 전곡 음반이 무수히 나왔음을 생각하면 뜻밖의 일이다. 하물며 비발디의 다른 여러 곡이 푸대접받았음은 말할 나위 없다.
베네치아의 명소 아카데미아 다리 왼쪽에는 커티스 가문의 바르바로 궁전(Palazzo Barbaro)이 자리한다. 커티스 가문의 초대를 받은 폴리냐크 대공 부부는 바르바로 궁전에서 운하 건너편 궁전을 보았고, 그곳에 살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대공비는 남편의 생일에 콘타리니 폴리냐크 궁전(Palazzo Contarini Polignac)을 선물했다. 이 대공비의 본명은 위나레타 싱어(Winnaretta Singer)로, 재봉틀로 큰 부를 이룬 아이작 싱어(Isaac M. Singer)의 상속녀 중 한 명이다. 그녀는 남편 사후에도 많은 예술가를 후원했는데, 각계 명사와 쟁쟁한 이름의 젊은 음악가가 그녀의 살롱에 드나들었다. 그 가운데 특별한 커플은 바로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와 그의 정부(情婦)인 바이올리니스트 올가 러지(Olga Rudge)다. 이 두 사람은 20세기 전반 비발디가 부흥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주역이다.





산마르코 광장의 종탑.

비발디를 발굴한 이들
파운드의 이름은 현대시의 최고봉으로 일컫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1922)에 가장 값있게 쓰였다. 이 시는 “탁월한 창작자 에즈라 파운드에게”라는 헌사로 시작한다. 같은 해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스(Ulysses)>도 파운드 덕분에 빛을 보았다. 그러나 정작 파운드가 평생 매달린 <칸토스(Cantos)>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그는 무솔리니에게 협력하고 반유대주의를 주장해 전후 미국으로 송환되어 반역죄로 재판받았는데, 과대망상증을 진단받고 처형은 피하는 대신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엘리엇과 헤밍웨이가 구명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가 풀려난 것은 1958년의 일이다. 이후 베네치아로 돌아간 파운드는 1972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거의 잊힌 존재였다. 그런 그를 알리고 오해를 벗기고자 노력한 이가 애인 러지였다. 그녀는 1996년 100세를 일기로 작고하기까지 파운드와 살았던 베네치아 집(‘숨겨진 둥지’라 불렀다)을 지켰다.
다시 1743년, 후손이 없는 비발디가 죽은 뒤 방대한 악보는 여러 손을 거쳐 제네바 귀족 자코모 두라초(Giacomo Durazzo) 백작에게 넘어갔다. 이후 100년 넘게 잠자던 비발디는 19세기 말 두라초 가문이 한 신학교에 악보를 기부하면서 부활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고, 다시 매물로 나온 것을 토리노 국립 도서관장 루이지 토리(Luigi Torri)와 그의 친구이자 음악학자 알베르토 젠틸리(Alberto Gentili)가 발굴했다. 1930년대 들어서야 비발디의 존재가 다시금 알려진 것이다. 1924년 파리의 위나레타 살롱에서 처음 만난 파운드와 러지 커플은 1930년대 제노바 인근 라팔로에 살던 중 토리와 젠틸리가 발견한 비발디의 가치를 곧바로 알아보곤 작품 목록을 작성했다. 위나레타의 아낌없는 후원을 통해 러지가 초연한 비발디의 협주곡은 300곡이 넘으며, 러지는 1938년 베네치아에 비발디 연구소를 열기에 이른다.
나이브 음반사는 20세기 말부터 450곡이 넘는 작품을 망라한 비발디 전집 음반을 발매 중이다(현재 71집까지 나왔다). 초기 발매한 음반 내지에는 비발디에 대한 파운드와 러지의 기여가 소개되었는데, 이 내용은 얼마 뒤 사라졌다. 비발디 권위자인 페데리코 마리아 사르델리(Federico Maria Sardelli)가 소설 <비발디 사건(L’affare Vivaldi)>(2015)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이유다. 비발디의 가치를 알아본 토리와 젠틸리는 유대인이었기에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파운드는 수중에 떨어진 비발디 발굴의 공을 파시스트 정권의 업적으로 돌리는 데 앞장섰고, 결국 오늘날 파운드와 러지는 맹목적인 열정 탓에 최소한의 공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들을 후원한 폴리냐크 대공비의 궁전 바로 옆에는 페기 구겐하임이 세운 미술관이 있다. 당시 재단 이사였던 라이랜즈(Rylands) 부부는 정신이 흐려진 노년의 러지에게 접근해 호감을 산 뒤 그녀가 보관 중인 파운드의 많은 유품을 빼돌린다. 천재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높이 산 예일 대학교에 팔아버리지만, 러지와 파운드가 낳은 딸이 이 사실을 안 뒤엔 이미 늦어버렸다.
인파가 넘치는 아카데미아 다리 뒤 후미진 골목 안쪽에 위치한 ‘숨겨진 둥지’는 흔적만 남아 있으나 ‘죽음의 섬’ 산미켈레에 자리한 두 사람의 묘역에는 추모의 꽃이 끊이지 않는다. 파운드는 <칸토스>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올가의 아름다움의 행동들 기억되리. 그녀의 이름은 용기 그리고 올가라고 쓴다.”





파운드와 러지가 살았던 '숨겨진 둥지'.
피에타 성당 내부.
카페 플로리안의 야경.


베네치아의 놀라운 보물들
동시대를 살았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오랜 세월 독일 음악의 굳건한 토대가 된 것에 비하면 비발디 발굴의 역사는 채 100년이 못 되고, 그나마 풍파를 겪으며 여전히 많은 작품이 빛을 보길 기다리고 있다. 비발디는 20세기 후반의 팝스타와 팽팽하게 겨뤘음은 물론, 21세기에도 여전히 ‘신곡’을 발매한다. 놀라운 것은 그런 음악가가 비발디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작곡가는 최근 들어 그 업적이 드러났다. 미술이나 문학과 달리 음악은 대개 일회성으로 창작되었고, 누군가 다시 찾기 전에는 오선 위 음표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 카발리(Francesco Cavalli, 1602~1676)를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는 비발디가 태어나기 직전까지 베네치아에 살며 40편이 넘는 오페라를 작곡했다(다작인 베르디가 28편을 썼다). 1637년, 베네치아에 사상 처음으로 대중을 위한 산카시아노 극장(Teatro San Cassiano)이 문을 열었다. 왕이나 귀족이 사적으로 보는 공연이 아니라 일반인에게 좌석을 팔아 운영하는 오늘날의 극장이다. 카발리는 문예부흥을 타고 ‘발명’된 종합예술 오페라의 폭발적 수요에 부응한 것이다. 공연하는 족족 거리를 휩쓸던 카발리의 오페라는 다음 시즌에는 다른 작품으로 대체되었다. 카발리 다음에는 비발디가, 비발디 뒤에는 또 다른 후배 작곡가가 선배의 자취를 덮었다. 그런데 불과 10여 년 전, 깡그리 잊힌 카발리의 오페라 27편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바로크의 베르디’가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다! 악보는 최고 고음악 전문가 레오나르도 가르시아 알라르콘(Leonardo Garca Alarcon)에게 넘어갔다. 그는 베네치아 바로크 음악 센터 후원으로 오페라 예술의 찬란한 여명에 맹렬히 숨을 불어넣는 중이다. 관광객 대부분은 이토록 놀라운 발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곤돌라에 기댄 채 사공에게 노래를 청한다. 괴테와 바그너가 앉았던 산마르코 광장의 노천카페에서 아페롤 스프리츠에 취기가 오른 사람들이 베네치아의 밤을 저 나름대로 찬양한다.

 

에디터 김혜원(haewon@noblesse.com)
글·사진 정준호(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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