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도의 세계 - 노블레스닷컴

Latest News

    LIFESTYLE
  • 2024-02-02

향도의 세계

토닌갤러리 큐레이터 하야시 마사키에게 듣는, 미묘함의 미학으로 점철된 일본 전통 향 문화.

기억, 감정과 강하게 연결된 후각은 삶을 한 차원 높여준다. 때때로 특정 향기가 시간 여행을 하듯 과거 기억을 또렷이 일깨우고, 긍정적 경험에 크나큰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처럼.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냄새를 맡고 단숨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파트리크 주스킨트의 책 <향수> 속 천재적 후각을 지닌 ‘그루누이’가 운명의 여인에게서 나는 매혹적인 체취를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 몰두하는 모습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동시에 향기는 정서적 안정감을 통해 몸과 마음의 이완을 돕는 테라피 효과를 발휘한다.
이렇듯 놀라운 힘을 지닌 향을 이용해 즐기는 일본 전통문화 ‘향도’. 차를 음미하기 위한 모든 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다도처럼, 향도는 주로 동남아 지역에서 자라는 향나무에서 천연적으로 발생한 수지가 침착된 수간목 ‘침향’을 이용해 향을 즐기는 예법 혹은 추측하는 놀이를 의미한다. 여러 개의 침향을 달군 숯을 넣어 재로 덮은 향로의 은은한 열기로 태워 하나하나 차례대로 음미한 뒤, 임의로 순서를 섞은 침향을 다시 돌려가며 처음과 비교해 각 향을 구별해내는, 후각을 활용한 고차원적 유희다. 오르골 갤러리이자 일본 문화를 국내에 알리는 토닌갤러리 큐레이터 하야시 마사키는 “여러 설 중에서도 538년경 중국에서 불교가 유입됨에 따라 침향이 전해졌다는 것이 가장 유력합니다. 절에서 분위기 전환 등 종교적 이유로 사용하다 점차 왕족이나 귀족, 무사 등 신분이 높은 이들이 자기 표현의 도구로 향을 활용하면서 침향과 다양한 향신료를 섞어 존재감을 드러냈어요. 그러다 귀족 사이에서 향을 단순히 음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자리에서 서로 맞춰보는 식의 놀이가 등장했죠. 그렇게 에도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향 문화가 자리 잡았고, 귀족들이 즐기던 ‘오이에류(御家流)’와 무사들이 따르던 ‘시노류(志野流,)’로 나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위쪽 향도에 쓰이는 필수 기물. 각각 정해진 순서와 자리에 따라 진열한다.
아래쪽 향 놀이 시작 전, 부드러운 천을 이용해 모든 도구를 경건하게 닦는다.

향도에서 가장 중요한 침향은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나는 20~50년 된 향나무에서만 얻을 수 있다. 생채기가 난 20~50년이 넘은 향나무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분비한 진액이 표면에 굳어 자연 생성된 것으로, 그야말로 시간과 자연, 우연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나무는 썩어 없어지더라도 침향은 몇십 년, 몇백 년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 고고한 가치를 드러낸다. 1g에 몇천만 원을 호가하기도 하는 침향을 일본에서는 ‘갸라(伽羅)’, ‘라쿠니(羅國)’, ‘마코토난반(眞南蠻)’, ‘마코토나카(眞那賀)’, ‘사소라(佐曾羅)’, ‘슨몬타라(寸門多羅)’ 등 크게 6종으로 나눈다. 나아가 단맛·신맛·짠맛·매운맛·쓴맛의 다섯 가지 맛으로 구분(六國五味, 롯코쿠고미)한다. 그중에서도 베트남에서만 나는 갸라는 다섯 가지 맛을 모두 낸다고 해 가장 귀한 향으로 꼽는다. ‘명(名)을 얻은’ 침향도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아주 오래전 왕실과 귀족 집안에서는 희소한 침향에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오직 대대로 물려받음으로써 소유할 수 있었다.
상류층의 전유물이던 향 문화의 표현에는 시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먼저 향을 ‘맡는다’가 아닌 ‘듣는다’고 표현한다. 같은 침향이라도 부위에 따라 다른 향을 내고, 그날 날씨와 개인의 컨디션에 따라 똑같은 향이라도 달리 느낄 수 있기에 ‘마음을 열고 섬세하게 귀 기울여 듣는다’고 말하는 것. 또 향도에서는 항상 하나의 테마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 호스트가 준비 과정에서 미리 헤이안시대의 일본 운문 ‘와카(知歌)’를 선정하고, 해당 테마에 맞는 침향으로 향도회를 꾸린다. “한국에서는 꼭 와카가 아니더라도 호스트인 제가 직접 향도에 함께하는 게스트의 성격이나 향도회가 열리는 계절에 맞게 시를 고릅니다. 꼭 고전시일 필요는 없습니다. 향 놀이를 마치면 ‘기록지’를 적는데, 이곳에 테마를 포함해 그날의 모든 것을 기록하죠. 언제, 어떤 테마로, 누가 이 자리에 모였는지, 어떤 침향을 사용했는지 등의 내용으로 구성합니다. 귀한 침향이 나오거나 유명한 호스트가 자리를 꾸릴 때 이 기록지 역시 높은 가치를 지니고요.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 즉 ‘일생에 한 번뿐인 인연과 만남’이라는 데 큰 의미를 두기 때문입니다.” 하야시 마사키의 설명이다.
결국 향도는 미묘함의 미학이 깃든 향을 바탕으로 사람과 향, 사람과 사람의 인연 등 우연한 만남을 통해 예술성을 품는다. “사실 향도는 현재 일본에서도 일반적으로 접할 수 없는 고귀한 취미입니다. 가장 중요한 침향 자체가 귀할뿐더러 향도를 다루는 사람도 극히 드물죠. 그럼에도 오늘날 향도의 의미와 그 가치는 명상적 성격에 중점을 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요. 고요히 침향을 들으며 심신의 안정을 얻고, 편안한 마음으로 오롯이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거든요.” 일본에서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몸에 밸 때까지 수행해야 하는 걸 의미한다. 마사키 역시 20년의 세월 동안 같은 방식으로 향도를 해오며 향을 외우기보다 지속적으로 들으며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소중한 인연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좋은 향을 나누는 것은 물론이다. “개인적으로는 침향이나 도구를 컬렉팅하는 것도 향도의 재미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무사들의 정신 교육에 목적을 둔 시노류와 달리 귀족들의 풍류인 오이에류는 화려한 도구를 사용해 눈으로도 즐긴다는 장점이 있죠. 도구의 경우 대부분 주문 제작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앤티크를 구해야 하지만 하나둘 모으다 보면 자신이 원하는 도구로 꾸려 향도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색다른 즐거움으로 이어집니다.”





침향.
침향 조각, 유리판 등을 집을 때 사용하는 선형 도구와 향합.
달군 숯을 넣어 산 모양으로 쌓아 올린 재 위에 은엽을 두고 간접적으로 침향을 태운다.

 

에디터 손지수(jisuson@noblesse.com)
사진 김잔듸
도움말 하야시 마사키(토닌갤러리)

관련 기사

페이지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