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화가 먹으로 말하고 싶은 것
6월 갤러리현대 그룹전을 앞둔 어느 봄날, 작업실에서 작가와 나눈 사랑과 예술에 관한 대화.

작업실의 정취가 무척 인상적이에요. 빛, 작품, 수집품이 어우러진 이곳은 단순히 그리는 공간을 넘어선 듯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 공간을 가꿨나요? 늘 오래된 것을 찾아 떠났어요. 이전 작업실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1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적산가옥이고, 입구의 창은 없었는데 새로 낸 거예요. 파리 부르델 박물관과 알렉산더 콜더 스튜디오에서 영감을 받았죠. 살면서 불편을 마주한 순간이 남들보다 많은 것 같아요. ‘왜 그래야 하지?’ 질문하며 타협하는 걸 어려워했고, 그런 자신을 바보처럼 여긴 적도 있죠. 그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름답게 사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하나씩 곁에 두다 보니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어요.
창 너머 정원이 소박하면서 아름다운 맛이 있네요. 제게 정원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안과 밖,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삶과 죽음이 머무는 하나의 경계에 가까운 세계예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주로 오래된 작은 정원에 머뭅니다.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제게 작업과 다름없어요. 유년 시절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과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늘 곁에 두며 정원이란 식물을 가꾸는 공간을 넘어 마음을 다듬고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라는 것을 배운 것 같아요.
삼국시대부터 근현대까지 다양한 시대의 미술품을 수집해왔어요. 이토록 옛것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미술에 대한 제 애정은 혜곡 최순우 선생님과 그분의 제자인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님의 영향이 커요. 제 소장품 중 상당수는 이전 세대 수집가들에게 전해 받은 거예요. 근래 수집을 투자로만 여기는 세태가 아쉬운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수집의 진짜 의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이어진 ‘전승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긴 시간을 견뎌온 것들이 지닌 힘을 믿어요. 시간이 쌓아 올린 가치는 무엇으로도 흉내 낼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저 역시 오랜 시간과 깊은 사유가 응축된 작업을 하고 싶어요.
소장품이 “작품의 벗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존경하는 예술가들의 글과 그림을 보며 대화하고 위로를 얻는 순간이 많았어요. 특히 근대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끝까지 작업을 이어간 강인한 정신을 마주할 때면 제 힘듦이 무색해질 때도 있었죠. 무엇보다 과거의 예술가들이 시대적 · 개인적 어려움으로 못 다 이룬 꿈을 대신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커요. 소장품 전시나 제 작품을 통해 그들을 계속 재조명해온 것도 결국 그 때문이에요.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그때부터 동양화가 잘 맞았나요? 중학교 1학년 때 미술부 선생님의 권유로 동양화를 시작했어요. 서양화처럼 덧칠해 쌓아 올리는 방식과 달리 단번에 결과를 내야 하는 호흡이 제 성미와도 잘 맞았어요. 성격이 급해 즉각적으로 결과를 봐야 했거든요. 제 작업은 스케치가 따로 없어요. 순간의 우연성에서 나오는 쾌감을 굉장히 즐겨요. 사실 학생 때에는 나이에 맞지 않게 그림에서 노숙함이 묻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어요. 하지만 묵묵히 저만의 스타일을 다져갔어요. ‘천 장의 그림을 그려오라’는 과제에 못해도 몇백 장은 그릴 정도로 노력했죠.(웃음)
먹의 순간적 번짐을 이용하는 화법을 고수해왔어요. 그림 속 대상을 표현할 때 무엇을 중시하나요? 대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미니멀한 표현 속 깊은 함의를 담아내길 바라요. 단 한 번의 붓질처럼 보이지만 사실 촘촘한 레이어로 이루어져 있어요. 물을 많이 섞어 옅게 만든 담묵으로 전체를 잡고 먹이 마르기 전에 중간 농도의 먹으로, 그다음 더 강한 먹으로 묘사를 더하는 식이죠. 다 마르고 나면 하나의 표면 같지만 쌓아 올린 흔적이 분명히 존재해요. 흔히 동양화는 선(line)의 세계라고 하잖아요. 제 작품엔 선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양모 관장님의 말씀처럼 번짐 속에 선이 숨어 있는 셈이에요. 다만 손에서 ‘붓이 놀아나는 순간’을 경계해요. 기계적 접근을 배제하려는 노력이죠. 가령 옛 도자기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아름다움을 오늘날 구현하기 어려운 이유는 순정 때문이 아닐까 해요. 되도록 사심 없이, 사심이 생길라치면 조금은 흐트러지기도 하면서, 만드는 사람 본연의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편이에요.
작업실 한편에 많은 습작이 쌓인 사진을 본 적 있어요. 화법의 특성상 작업 속도는 비교적 빠를 테지만 순간적으로 더 집중해야 해서 진이 빠질 때도 많을 것 같아요.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 물리적 시간은 하루 남짓이지만 작품이 나오기까지 며칠이 걸려요. 사실 저는 그렇게 집중하는 시간이 좋아요. 순간적 쾌감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이 작용하는 것 같거든요. 막상 끝내고 보면 ‘내가 그린 게 맞나’ 싶을 때도 있어요. ‘다시는 그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웃음)
인물의 눈이 생략된 경우가 많아요. 무엇을 의도한 숨김인지.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볕뉘’라는 말이 있어요. 구름 사이로 아주 잠깐 스며드는 햇빛을 뜻하는데, 저는 그 순간을 자주 떠올려요. 눈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바로 그 볕뉘와 닮았어요. 어떤 것이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찰나의 순간과 비슷해요.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무언가 존재하고요. 너무 짧게 드러나는 순간이라 미처 보지 못하는 무언가에 가까워요.
그윽한 노란빛 바탕 역시 특별해 보여요. 어떤 종이인가요? 직접 제작한 특수 종이예요. 일반 장지보다 거칠지만 그만큼 먹의 레이어가 다채롭게 쌓이죠. 10년 전부터 고수해왔는데, 제겐 결과물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그 과정이 무척 중요해요. 능호관 이인상을 존경하는 이유도 그 지점에 있어요. 그는 스스로를 화가 이전에 선비로 여기고, 선비의 고결함과 기백을 담기 위해 종이에 쌀뜨물로 미리 배경을 칠했어요. 보는 이들은 알지 못할지라도 본인은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 어떤 정신이었던 거예요. 저는 그런 것이 좋아요. 작업하며 종이는 물론 병풍 뒷면의 천까지 일일이 제작하는 등 남들이 알지 못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이유죠.
6월 갤러리현대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감각을 지닌 한국 작가들을 호명하는 전시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Sauve qui Peut)〉에 참여하죠. 오랜만의 전시 소식이라 반가웠어요. 그동안 전시나 인터뷰에 그렇게 활발히 참여하진 않았어요. 과거의 저는 뭐랄까, 새벽 달 아래 잔잔한 호수처럼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3년 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힘든 일을 겪고 마음가짐이 조금 바뀌었어요. 지금 저는 맑은 날의 윤슬을 향해 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 같아요. 마침 이번 주가 그의 기일이네요. 오래 연을 맺었고 제 작업에 대해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에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의 향기’라는 작품이 그 예죠. 처음 함께 여행을 가던 날 저는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그는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를 선물한 일화가 작품의 바탕이 됐어요. 그림 속 두 인물은 저와 그 사람이에요. 위에 그린 새에는 그의 부재로 인한 제 그리움, 새가 되어 재회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어요.
2024년 앤솔로지아갤러리에서 추모 성격의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죠. 박래현, 박노수, 장욱진, 윤광조, 김환기, 이우환의 작품 등 앞서 말한 사랑하는 그분과 영감을 주고받은 한국 미술품을 한자리에 모았고요. 서정주 시인의 시집 〈귀촉도〉 속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구절이 전시의 시작점이었어요. 제가 쓴 소설 〈시인의 새〉가 전시 구성의 바탕이 됐어요. 주인공은 푸른색이 사라진 미래에 사는 파랑 채집가예요. 그는 숲속에서 만난 파랑새에게 ‘보이지 않지만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 답으로 얻은 푸른 깃털을 통해 생애 첫 푸른색 그림을 그리게 돼요. 전시장에는 그 이야기의 조각들을 수수께끼처럼 흩어 놓았어요. 작품들은 하나의 문장이 되기도 하고 때론 풀리지 않는 질문처럼 남으며 서로 다른 시간들이 겹쳐지고 보이지 않던 감각들이 천천히 떠오르기를 바랐어요. 그리움을 재현하기보다 그리움이 머무를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싶었어요. 사랑이 어떤 빛과 무게로 한 사람의 삶을 푸르게 물들이는지, 그 감정이 시간을 건너 어떻게 남는지 이야기하고 싶었죠.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에 가까워요. 그래서 그 전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 그리움과 기억이 한 사람을 어떻게 계속 살아가게 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질문이었어요.
오늘날 예술의 ‘쓸모’란 무엇일까요? 솔직히 가장 힘든 시기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꼈어요. 정신적으로 무방비 상태일 땐 어떤 음악이나 그림도 그저 소음처럼 다가오더군요.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이 있기에 고된 시간을 견디며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수집과 작업 또한 제게 그런 존재였고요. 동시에 깨달은 것은 모든 것 위에 사람과 사랑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만이 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사실이에요. 이를 전제로 할 때 예술 또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요.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한 지 10여 년이 흘렀어요. 그간의 여정 중 자연스러운 변화와 반대로 변치 않고 지켜나가고 싶은 가치는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나무는 처음부터 숲이 되려 하지 않고 먼저 바람 속에 서서 자신만의 방향으로 자리를 잡는다.” 얼마 전 작가 노트에 써둔 문장이에요. 그간 저는 이런 과정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시간은 제 작업으로 숲을 이루고 그 숲을 목격하는 사람들을 위한 계절이 되어주고 싶어요. 이번 전시 역시 그랬으면 하고요. 결국 그리움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 거예요. 지금은 무엇보다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 때잖아요. 인간다움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지그시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 색깔을 아는 것부터일 수 있죠. 지금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