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오버, 관계를 직조하는 일 | Noblesse

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크로스오버, 관계를 직조하는 일

ARTNOW
구글 선호 매체로 추가

구글 검색과 ai 답변에서
노블레스 닷컴을 우선적으로 보여줍니다.

단지 서로 다른 장르를 섞는 시대는 지났다. 오늘날 예술 신에서 크로스오버는 분리돼 있다고 믿던 세계를 다시 연결하고 그 새로운 관계를 감각하는 방식 그 자체다.

<혀 달린 비> 전시 전경. 3명의 여성주의 시인 세실리아 비쿠냐, 차학경, 김언희에게 영감을 받은 극장형 전시로, 서로 다른 시간대를 조직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Photo by Seowon Nam. Courtesy of Art Sonje Center.
<혀 달린 비> 전시 전경. 3명의 여성주의 시인 세실리아 비쿠냐, 차학경, 김언희에게 영감을 받은 극장형 전시로, 서로 다른 시간대를 조직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Photo by Seowon Nam. Courtesy of Art Sonje Center.

서로 다른 장르가 만나고 예술과 기술이 결합하며 공연과 건축, 패션과 미술이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우리는 ‘크로스오버(crossover)’라고 부른다.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예술가는 시대를 대표하는 창작자로 호명되고, 협업은 창의성의 중요한 조건처럼 여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변화는 단순히 장르를 넘나드는 현상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본래 전통적 크로스오버라는 말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영역이 있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특별한 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크로스오버는 견고한 경계를 넘는 예외적 사건이다. 하지만 오늘날 현실은 이러한 구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기술인 동시에 금융이고, 지정학이며 문화다. 기후 위기는 환경문제면서 경제와 정치, 과학과 윤리, 도시와 일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디지털 플랫폼은 미디어인 동시에 노동환경이고 사회적 인프라이며 감정의 구조를 재편하는 장치가 됐다.

이제껏 서양 근대 문명은 ‘분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해왔다. 그로 인해 학문은 세분화됐고, 예술은 회화와 조각, 음악과 무용, 건축과 디자인으로 구분됐다. 미술관과 공연장, 영화관과 콘서트홀은 서로 다른 관람 방식을 전제로 존재했고, 예술가 역시 하나의 장르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했다. 이러한 분리는 근대가 남긴 중요한 지적 성취였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변화는 세계가 갑자기 복잡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분리돼 있다고 믿던 세계가 애초에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었음을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크로스오버를 단순한 장르의 혼합이나 협업의 기술에 국한해 말할 순 없다. 그것은 이미 상호 의존적으로 작동하는 현실을 예술이 감각하고 조직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문성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전문성은 서로 다른 지식과 기술, 제도와 감각의 관계를 읽어내고, 그것을 새로운 구조로 엮어내는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2025년 필자가 기획한 홍영인 작가의 전시 <다섯 극과 모놀로그>는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직물과 퍼포먼스, 자수와 사진, 그리고 192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여성 노동의 역사를 하나의 작업에서 엮는 이 작품의 논리는 단순 매체의 결합이 아니라 직조에 가깝다. 하나의 실은 다른 실과의 긴장 속에서만 의미를 얻고, 전체는 중심 없이 수많은 교차와 의존을 통해 형성된다. 길이 40m의 원형 프레임에 새긴 자수 태피스트리 ‘다섯 극’은 하나의 시점으로는 읽을 수 없다. 관람자는 걸으며 방향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저마다 다른 순서와 속도로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작가가 보행을 전제로 바이외(Bayeux) 태피스트리라는 형식을 택했다면, 원형 구조는 시작과 끝의 위계를 지우고 역사를 순환하는 시간을 재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조각은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 즉 ‘조각적 사건’이 된다.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는 오브제가 아니라 몸이 이동하는 시간 속에서 의미를 분배하는 상태로서 오브제 말이다.

<홍영인: 다섯 극과 모놀로그> 퍼포먼스 전경. Photo by Seowon Nam. Courtesy of Art Sonje Center.
<홍영인: 다섯 극과 모놀로그> 퍼포먼스 전경. Photo by Seowon Nam. Courtesy of Art Sonje Center.

이렇듯 오늘날 예술은 더 이상 하나의 매체 안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하나의 질문은 몸과 물질, 공간과 시간, 역사와 감각을 오가며 가장 적확하고 필요한 형식을 선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로스오버는 여러 장르를 병렬적으로 수행하는 능력이라기보다 하나의 예술적 사유가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형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컬렉티브라는 집단의 작업 방식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컬렉티브는 하나의 사안이 여러 형식을 동시에 요구할 때 형성된다. 다양한 전문성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가 여러 전문성을 필요로 할 때 탄생한다. 자신을 시각 연구 밴드라 정의하며 식물과 자연현상, 인류, 생태학의 연계를 탐구하는 이끼바위쿠르르는 퍼포먼스와 설치, 음악, 출판, 워크숍을 유기적으로 엮으며 창작의 주체를 개인이 아닌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존재로 재구성한다. 영국의 엘리엇 우즈와 한국의 손미미로 이루어진 듀오 김치앤칩스는 빛과 알고리즘, 조각과 공학을 교차시키며 기술을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지각을 구성하는 조건으로 다룬다. 영국의 건축 컬렉티브 어셈블(Assemble)이 리버풀 그랜비 지역의 주거 재생 프로젝트로 터너상을 수상한 사건 역시 건축과 미술의 경계를 허문 경우라기보다 사회적 실천 자체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사례로 읽을 수 있다. 동시대 전시에서 크로스오버는 더 이상 매체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다. 교차하는 것은 장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대이며, 전시는 그 시차를 조직하는 장치가 된다. 2024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혀 달린 비>는 이러한 시간 특정적 전시의 한 사례다. 극장에 들어선 관람객은 먼저 세실리아 비쿠냐의 ‘소리로 꿈꾼 비: 차학경에 대한 경의’를 약 20분간 마주한 뒤, 차학경이 1980년 한국에서 촬영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필름 ‘몽골에서 온 하얀 먼지’를 만난다. 이 순서는 의도적으로 뒤바뀌었다. 애도가 먼저 도착하고, 애도의 대상은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앞서 홍영인의 전시에서 시간이 관람자의 보행 속도와 몸의 리듬을 통해 구성됐다면 여기서는 두 존재 사이에 놓인 역사적 시차가 전시 구조를 이룬다. 관람자는 그 사이를 자신의 몸으로 통과하며 비동시성을 경험한다. 전시는 작품을 배열하는 공간을 넘어 서로 다른 시간대에 접속하고 그 사이의 거리를 조직하는 장치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 거리가 끝내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쿠냐와 차학경이 만나지 못하는 것 그 자체가 전시를 통해 상연된다. 이처럼 크로스오버는 서로 다른 매체를 결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시간이 하나의 현재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발생한다.

이러한 전시 실험은 오늘날 크로스오버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크로스오버는 이미 확립된 경계를 혼합하거나 초월하는 전략이 아니다. 서로 다른 존재와 매체, 역사와 시간이 하나의 현재를 공유하면서도 끝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관계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이는 장르의 소멸을 선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매체의 고유한 물질성과 시간성을 유지한 채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동시대 예술의 과제는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합치는 데 있지 않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관계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크로스오버는 장르의 혼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과 존재가 하나의 현재를 공유하는 관계적 사건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