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티보 최연소 우승! 김세현을 만나다
기교 너머 시와 상상력을 들려주는 피아니스트 김세현의 음악, 그 첫 장에 관하여.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는 근 20년 동안 벼락과도 같은 축복이 쏟아졌다. 다수의 콩쿠르에서 한국인 음악가가 우승하며 전 세계가 새로운 ‘원석’이 등장하는 순간을 함께 목도했고, 그들이 선사하는 음악 속으로 더 깊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2025년 프랑스의 롱-티보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승을 차지한 김세현은 이러한 우리의 즐거움이 끊이지 않을 거라는 기분 좋은 증표와도 같다. 그러나 김세현의 음악에 대해 아직 어떤 ‘색채’를 논하기는 이르다. 만 19세, 그는 여전히 문학과 피아노를 공부 중인 청년으로 이제 막 자신의 음악을 펼쳐내기 시작했으니까. 우리가 김세현이라는 피아니스트에게 느끼는 감정은 ‘확신의 찬사’보다는 ‘미지에 대한 설렘’에 가깝다.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에 깃든 신중함과 조심스러운 태도, 그만의 우아하고 따뜻한 음색은 ‘젊은 피아니스트’라는 스테레오타입에서 얼마간 비껴나 있다. 워너클래식에서 낸 데뷔 앨범 , 그리고 세계를 무대로 빼곡히 잡힌 스케줄을 통해 막 열리기 시작한 그의 첫 챕터가 더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아니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 앞에서 겸손한 마음가짐”이라 말하는 이 젊은 음악가와 그 첫걸음과 음악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보스턴에 살고 있죠? 공연이 없는 평소 일상의 루틴이 궁금합니다. 지금은 방학이라 연주가 없는 날에는 아침에 일어나 아주 간단한 운동을 한 후 연습을 시작해요. 학기 중 오전 수업이 있으면 학교에 먼저 가고요. 쉴 때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책을 읽고, 산책을 합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끼 정도 먹어요. 실은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어요.
현재 뉴잉글랜드 음악원(NEC)에 재학 중이죠.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버드 대학교와의 복수 학위 프로그램, 혹은 교수진 때문이었나요? 둘 다예요. NEC의 경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선생님이었어요. 당타이선, 백혜선 선생님의 지도 아래 있다는 건 제게 큰 영광이자 행운이며, 그 두 분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학교는 NEC밖에 없어요. 하버드와 NEC의 복수 학위 프로그램에 대한 망설임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하버드와 NEC를 각각 따로 지원해야 해서 시간이 두 배로 소요되기 때문이에요. 하버드는 학사과정을 남들과 똑같이 지원해야 하고, NEC에선 하버드에 붙으면 자동으로 석사과정이 되기 때문에 오디션 커트라인이 학사 지원자보다 높아요. 자칫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치는 건 아닐까 고민도 했지만,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도전해보겠나 싶었어요.
백혜선은 러셀 셔먼의 계보를 잇는 피아니스트이자 훌륭한 아티스트들을 키워낸 선생으로 유명하죠. 당타이선은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전설적 피아니스트고요. 두 사람의 티칭 스타일은 어떻게 다른가요? 각각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지 궁금합니다. 당타이선 선생님은 소리와 표현에 대해 좀 더 세세히 지도하는 스타일이고, 백혜선 선생님은 요즘 제게 전체적 구조에 대해 집중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어요. 일반화하긴 조심스럽지만 당타이선 선생님은 프랑스 음악이나 쇼팽을, 백혜선 선생님은 독일 음악을 더 자주 연주하는 것 같아요.
하버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것도 화제가 되었어요. 세현 씨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문학작품 몇 가지를 소개해주세요. 제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문학작품을 콕 집어 얘기하긴 아직 이른 나이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최근에 읽은 인상 깊은 책으로 지넷 윈터슨(Jeanette Winterson)의 이 떠올라요. 더 최근에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라는 단편을 읽었는데 인상적이었어요. 지금은 하버드에서 다가오는 가을 학기에 읽어야 하는 책들을 보고 있어요.
첫 음반 출시를 앞둔 소감이 궁금합니다. 실물 CD를 받아봤나요? 음반 발매는 어느 음악가나 어릴 때부터 꾸는 꿈일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10대에 그 꿈을 이루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실물 CD를 며칠 전에 받았는데 기분이 묘했어요. 내 손에 있는 이 작은 음반이 세계의 다양한 곳에서, 각기 다른 배경을 갖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가 닿는다는 게 실감이 잘 안 되더라고요.
첫 음반을 쇼팽과 포레로 시작한 이유는 뭔가요? 더불어 음반에 담긴 여러 곡 중 개인적으로 각별한 곡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우선 쇼팽은 제게 편하고 각별한 작곡가예요. 어릴 때부터 쇼팽의 곡을 많이 다뤄왔고요. 레퍼토리를 정할 때 먼저 음반의 중심이 될 곡으로 쇼팽의 12개 연습곡, 작품 번호 25를 골랐어요. 물론 제목은 ‘연습곡(étude)’이지만 하나하나 시적이고 상상력이 넘치는 곡이죠. 당타이선 선생님은 쇼팽의 연습곡은 늘 그의 전주곡을 연주하듯 풍부한 영감과 이미지를 갖고 연주해야 한다고 조언하며 제 선택에 힘을 실어주셨어요. 그리고 음반의 중심을 둘러싸는 곡을 무엇으로 채우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포레에서 그 답을 찾았죠. 포레의 작곡 스타일은 쇼팽의 음악 없이는 존재하지 못할 정도로 두 작곡가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음반의 모든 곡이 저에게는 특별하지만,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마지막 곡이 색다르게 다가올 것 같아요. 샤를 트르네의 샹송 ‘4월의 파리’를 알렉시 바이센베르크가 편곡한 피아노곡인데, 에펠탑 앞에서 진행한 ‘르 콩세르 드 파리(Le Concert de Paris)’의 야외 연주를 위해 배웠어요. 음반 전체를 놓고 보면 앙코르 같은 느낌도 들면서 ‘파리’라는 테마를 완성해주는 중요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9월에 열리는 리사이틀에서는 쇼팽과 포레의 곡 외에 슈베르트의 소나타 18번도 연주합니다. 이 곡을 선곡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까운 미래에 슈베르트 곡을 더 만날 수 있을는지요? 제가 예전부터 정말 좋아한 곡이고,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슈베르트 소나타 18번은 1악장 내면의 초월적 세계에서 시작해 4악장 자연과 함께하는 시골의 삶, 그에 대한 사랑과 감사함으로 끝나요. 슈베르트는 참 인간적인 작곡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음악은 직선적이기보다 원형적이죠. 계속 맴돌고, 방황하거든요. 어두운 현실과 맞서 싸우기보다 일시적으로 아름다운 도피를 택하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슈베르트의 음악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앞으로도 슈베르트의 음악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KBS교향악단과의 협연 무대를 앞두고 있어요. 정명훈 지휘자와 곡 선정이나 음악에 관한 대화를 나눠봤나요? 리사이틀과 협연은 각기 다른 매력이 있는데, 협연자로서 무대에 서는 것도 즐기는 편인지 궁금합니다. 정명훈 선생님께서 첫 만남에서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너의 직관을 따라라”라는 조언이었죠. 인생에 관한 조언이었지만 어느 분야에나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브람스 교향곡 4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브람스가 그 곡을 작곡한 나이가 됐을 때 비로소 그 곡이 이해되었다고 하시더군요. 시간과 기다림 그리고 인생 경험의 중요성에 대한 전언을 하나의 에피소드로 축약해 전해주신 것 같아요. 리사이틀과 협연은 각기 다른 매력이 있어요. 리사이틀은 ‘독백’인 반면 협연은 ‘협동’이죠. 개인적으로 리사이틀 때 ‘단 한 사람의 목소리를 모두가 숨죽여 듣는 그 마법 같은 순간’을 사랑해요. 반면 협연은 여러 사람과 함께해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너지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함께 음악을 만들어갈 때의 상호작용도 정말 특별하고요.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따라 제 연주도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고 느끼거든요. 협연자로서 무대에 서는 건 늘 특별한 경험이에요.
곡에 접근하고 해석하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우선 음악이 ‘그래서 결국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가 첫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디테일적으로 완벽한 연주라도 익살스러운 곡을 심오하게 연주한다면 곡의 에센스가 전혀 전달될 수 없죠. 당타이선 선생님이 하루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장례식장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가면 안 되지 않겠느냐고요. 반대로 결혼식에 장례식 차림으로 가서도 안 되고요. 곡의 큰 콘셉트를 이해하고 방향을 정한다면 차근차근 구조와 프레이즈를 포함한 다양한 음악적 요소가 드러나고, 부분마다 어떤 소리가 필요한지 분명해지죠. 그래서 그 소리를 결국 어떻게 현실 세계로 불러낼 것인지, 몸을 사용하는 법도 분명 고민해야 해요.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면 놀라운 연주가 나온다. 자신을 버리고 섬기는 마음으로 연주하면 더 이상적인 연주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실제로 연주에서 그런 자세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겸손함과 신중함, 조심스러움 같은 거요. 자신의 성격이나 평소 철학이 음악에 반영된다고 느끼나요? 단순히 다름을 위한 다름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결국 연주자가 아니라 음악이 빛나야 돼요. 자신을 내세우기 시작하면 음악이 숨 쉴 틈과 공간, 시간이 없어지죠. 음악은 마음가짐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저는 음악에 귀 기울이는 사람일 뿐이에요.
나이 들 때까지 음악을 하며 ‘이것만은 지키겠다’ 하는 결심은 무엇인가요? 음악 앞에서 겸손한 마음가짐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앞으로 활동 계획에 대해 간단히 말해주세요. 현재 유럽에서 약 7주간 투어를 마친 후 한국에서 협연 및 독주회 무대가 있어요. 그 후 파리와 보스턴에서 음반 발매 기념 독주회, 내년에는 마에스트로 정명훈 선생님의 지휘로 도쿄 필하모닉·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의 정기 연주회 데뷔 무대가 예정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