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하우스의 문화적 행보
동시대 패션 하우스가 문화를 매개로 독자적 세계관을 확장하는 방식에 대하여.



산업 간 경계가 흐려진 요즘, 패션 하우스는 컬렉션과 제품을 넘어 자신들이 지지하는 가치와 세계관을 문화적 행보로 드러낸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패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있다. 고가 제품으로 정의되던 패션은 소비 속도를 넘어서는 가치를 필요로 하며, 손에 잡히는 물질을 넘어선 정신적 유산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하우스들은 점차 예술과 문화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샤넬이 있다. 샤넬은 100여 년간 영화·무용·음악·건축 등 다양한 창작 영역을 후원해왔고, 이러한 흐름은 상하이 파워 스테이션 오브 아트 내 ‘에스파스 가브리엘 샤넬’에 집약되었다. 도서관을 중심으로 극장, 전시 공간, 디자인 센터를 갖춘 이 공간은 예술과 디자인·건축·문화·사회과학을 아우르는 아카이브를 통해 예술이 일상의 일부로 작동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까르띠에는 메종의 역사와 나란히 현대 예술과 관계를 이어오며 이를 브랜드의 중요한 언어로 삼았다. 그 결정체가 바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다.
1984년 설립된 이 재단은 작가들과 협업해 지속적인 예술적 실험을 이어왔으며, 최근 파리 팔레 루아얄에 새로운 공간을 열어 도시와 지역적 관계망이라는 현대적 질문을 던진다. 창작 과정을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삼은 사례로는 보테가 베네타와 로에베가 있다. 두 하우스는 공예 현장에서 축적된 감각을 통해 철학을 드러낸다. 보테가 베네타는 초기부터 다양한 창작자와 협업했으며, ‘보테가 포 보테가스’ 프로젝트를 통해 소규모 공방과 장인을 지원하는 등 제작의 가치와 연대를 강조했다. 최근에는 글로벌 아트 플랫폼 ‘마그마’를 후원하며 창작 과정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힘쓰고 있다. 로에베 역시 재단 공예상을 중심으로 공예의 가치를 현대 예술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며,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독자적 정체성을 구축해왔다. 반클리프 아펠은 2020년 출범한 ‘댄스 리플렉션’을 통해 현대무용의 창작과 재공연을 장기적으로 지원하며, 전 세계 여섯 번째이자 한국 최초로 이 프로젝트를 선보여 동시대 무용을 대중과 연결했다.
오데마 피게는 2012년 설립한 ‘오데마 피게 컨템퍼러리’를 통해 아티스트에게 전적인 자유를 부여하며 장소 특정적 작품을 선보였고,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기간에 진행되는 ‘패럴렐 콘서트’ 역시 낯선 장소에서 음악을 하나의 경험으로 제시한다. 영화는 브랜드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매체다. 생 로랑은 독립 제작사 ‘생 로랑 프로덕션’을 설립해 영화 제작 전반을 주도한다. 짐 자무쉬 감독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제8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생 로랑 프로덕션의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했다. 티파니 역시 넷플릭스와 협업해 영화 속 서사에 참여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에서 티파니의 주얼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닌 이야기의 일부로 기능한다. 이 외에도 아크네 스튜디오는 파리 팔레 루아얄에 갤러리 공간을 마련했고, 미우미우는 ‘우먼스 테일’이라는 단편영화 시리즈를 통해 여성 감독의 시선을 꾸준히 기록해왔다. 이처럼 하우스들이 선택한 문화적 장은 브랜드 미학을 실험하고 확장하는 공간이 된다. 문화에 대한 헌정은 브랜드가 추구해온 관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