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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19

동시대적 공예 큐레이션

전통과 현대 그리고 동서양을 잇는 한국 공예 갤러리 ‘모순’.

김예빈 대표.

근대 서울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정동길. 그 길 위에 자리한, 붉은 벽돌이 눈에 띄는 신아기념관(옛 신아일보 별관)은 이름과 배경을 다 알지 못해도 정동길을 걸어본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시선이 닿았을 대표적 건물이다. 몇 해 전부터 하나둘 상업 공간이 입주하며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져온 이곳에 2023년 2월 문을 연 한국 공예 갤러리 ‘모순’도 힘을 보탰다. 25평 남짓한 비밀스러운 갤러리 공간을 이끄는 인물은 30대 중반의 김예빈 대표 겸 큐레이터. 지금은 사라진 국내 최초 젓가락 갤러리 ‘저집’ 갤러리 매니저, 아트 디렉팅 스튜디오 ‘아트먼트뎁’ 아트 디렉터, 브랜드 다큐멘터리 매거진 <매거진 B> 브랜드 마케터 등 이력이 다양한 그는 우리 공예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멋진 오브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작은 막사발부터 달항아리, 고가구까지 두루 수집하며 자신만의 브랜드를 꿈꿔왔다. 공간 그 자체가 큐레이팅의 시작이라고 여기는 그에게 모순의 시작을 선보인 신아기념관에서의 시간에 대해 물었다.





붉은 벽돌의 신아기념관.

신아기념관은 1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근대 문화유산입니다. 모순이 이곳에 자리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첫 기획 단계부터 서촌, 북촌, 정동 쪽을 염두에 두었어요. 경복궁·창경궁·덕수궁 등 우리의 전통이 깃든 궁과 가깝고, 거닐기 좋았으면 했거든요. 무엇보다 종로구 일대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으로서 이 동네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고요. 정확히 이 공간을 만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100군데 가까이 알아봤는데,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하다 지금 모순 옆 공간인 202호가 매물로 나와 신아기념관을 알게 됐죠. 현재 ‘소일베이커’ 자리로, 당시에는 제가 생각하던 갤러리 공간으로 적합하지 않아 그냥 지나쳤어요. 그런데 그 뒤로도 이 건물이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여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6개월 동안 새로운 자리가 나길 기다리다 포기할 무렵, 정신분석센터 ‘판도’에서 공간 절반을 내놓아 곧바로 계약했습니다.
모순을 비롯해 리빙·라이프스타일 숍, 어린이예술교육원, 인테리어 디자인 스튜디오, 프랑스 기반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 등 건물에 들어선 시설을 살펴보니 전체적으로 크리에이티브라는 공통점이 있더군요. 옛 신아일보 사장 차남인 건물 소유주가 오래전부터 크리에이터를 위한 공간으로 꾸리고 싶어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이 건물의 정신을 표명하는 ‘입고창신(入古創新)’이라는 단어가 생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옛것으로 들어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의미가 담겨 있죠. 모순 역시 이러한 취지에 부합하는 활동을 전개하려고 노력 중이고요.
갤러리를 오픈하는 데 장소와 공간의 힘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솝’ 관계자에게 스토어 오픈 공간의 선정 기준에 대해 물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주변에 꽃집과 서점이 있어야 하는 등 나름의 조건을 갖춰야 한다더라고요. 저 역시 한 브랜드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동네 분위기를 특정 지을 수 있다는 입장이에요. 그렇기에 모순을 처음으로 선보일 만한 공간을 끈기 있게 준비하는 것이 큐레이팅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죠.
계절 변화가 뚜렷하게 느껴지는 동네라는 것도 장점 중 하나일 듯해요. 계절감 역시 중요한 요소였어요. 우선 걷기 좋은 동네여야 했으니까요. 이런 특징을 살려 각 계절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작가와 작품을 선정하기도 해요. 예를 들어, 오픈과 동시에 진행한 첫 전시에서는 겨울을 배경으로 김상욱, 김진규, 박성욱 세 작가의 분청 작업을 다뤘어요. 분청 특유의 희뿌연 눈이나 안개로 둘러싸인 듯한 느낌이 창밖 풍경과 잘 맞아떨어졌죠. 새 생명이 움트는 봄에는 강홍구 작가의 나무, 늦여름에는 Jun.GK 작가의 유리, 가을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단단함이 느껴지는 박지원 작가의 도예 작업을 각각 선보였습니다. 지난 연말까지 운영한 2023년 마지막 전시에서는 문순원 작가의 가죽공예를 전시했고요. 계절감을 곁들인 덕에 전시를 통해 더욱 풍성한 스토리를 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첫 전시 전경. © 윤미연

갤러리 곳곳에 가구를 배치하고, 각 전시에서 일부 작업을 그 위에 전시해 하나로 어우러지게 연출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어떤 의도가 담겼나요?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닌, 누군가의 집이나 작업실을 방문한 듯 편안함을 주기 위해서죠. 작품이 어떤 공간에 놓일 때 실제 모습을 연상할 수 있으면 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나무 고유의 무늬를 간직한 원목 바닥을 깔고, 미세한 회백색 페인트를 칠했어요. 또 모든 전시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그때그때 작품의 느낌에 따라 가구 배치를 바꿔보려 합니다. 현재 모순이 자리한 신아기념관 공간은 작은 방 여러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을 라운지·키친·다이닝 등으로 꾸며 언젠가 하나의 집처럼 완성하고 싶어요.
모순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가 궁금합니다. 에르메스의 철학을 담은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세계적 명품 브랜드에서 강조하는 ‘시대를 초월한 가치’는 우리 공예와도 분명하게 맞닿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전통적이면서 현대성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발현되는 ‘모순’이라는 단어의 긍정적 측면을 담고 싶었달까요. 또 갤러리에 비치한 우리나라 고가구와 영국·덴마크 빈티지 가구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에서 서로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은 까닭이기도 해요.
작가와 작업을 선정하는 기준이 따로 있나요?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동시에 자신만의 언어로 다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는 작가의 작업에 감응하곤 해요. 그게 꼭 테크닉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죠. 다른 누군가가 연상되기보다 자신만의 색깔이 확실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리고 작가와 작업을 선정할 때면 늘 습관처럼 제 상상 속 집을 떠올려보는데, 그곳에 놓였을 때 어울리는지에 따라 결정하기도 해요.





영국 빈티지 가구와 조화를 이룬 문순원 작가의 가죽 조형물.

상상 속 집은 어떤가요? 오래전부터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 여러 레퍼런스를 이리저리 조합해 상상했는데, 프렌치 모던 스타일에 가까워요. 그곳에 놓이는 것은 제 주관적 기준이기는 하지만, 모두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예요. 실제로 작가들과 미팅할 때마다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작가나 작업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미감은 무의적으로 느껴지니까요. 특히 럭셔리는 장인정신이나 작가정신처럼 만든 사람의 영혼과 정신을 얼마나 쏟아부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한 선정 기준에 대한 설명을 보다 구체적으로 덧붙이면 대체로 차분하고 심플한 작업을 선호하는데, 신기하게도 작가들의 성향도 대부분 내향적인 편이에요. 아무래도 만든 사람의 성격이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이겠죠.
다른 공예 갤러리와 차별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공예의 기능적 역할보다는 예술로 승화할 수 있다는 측면에 집중하고 싶어요. 회화의 경우 예술적 가치를 쉽게 인정받는 데 비해 한국 공예는 아직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죠. 컵이나 접시, 화병처럼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업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가격 장벽이 더 크게 받아들여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모순은 실용성에 주목하기보다 각 작가의 예술 세계를 선보이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모순을 운영하기까지 공예 갤러리 매니저, 아트 디렉터, 브랜드 마케터 등 다채로운 이력을 쌓아왔습니다. 이러한 배경이 모순을 운영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모순에서는 전시 외에도 에디터, 사진가와 함께 작가의 아틀리에를 방문해 작업 관련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어요. 모순만의 브랜드 콘텐츠를 제작하려는 활동이죠. 지금 이 시대에는 작품 자체의 퀄리티도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스토리텔링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잖아요. 셀러브리티들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더욱 친근하게 다가오고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처럼 작가에게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왜 만드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전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창밖으로 계절에 따라 바뀌는 정동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 내부.

1년 남짓 모순을 운영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뭐든 처음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당시에는 걱정이 앞섰는데 첫 전시 때 제 또래 부부가 방문해 박성욱 작가의 작업을 대량 구입한 적이 있어요. 수익이 난 것도 기뻤지만 저와 비슷한 취향을 지닌 젊은 부부가 이곳을 찾아와 실구매로 이어진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모순의 방문객은 의외로 20~30대나 남성의 비중이 꽤 높고, 온·오프라인에서 영어로도 안내하다 보니 외국인도 많이 찾아옵니다.
한국 공예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형태는 단순하지만, 특유의 수작업 디테일이 살아 있다는 것을 꼽고 싶네요. 색감도 우아하고요. 우리나라 전통 가구와 잘 어울리는 것은 물론, 해외 가구와 함께해도 이질감이 없어요. 그래서 외국인이 보기에도, 실제로 외국 어느 집에 놓아도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 같아요. 이른바 K-컬처의 부흥에 따라 음악이나 영화, OTT 작품에 이어 한국 공예가 해외 예술 시장에서 더욱 크게 주목받을 것으로 예상하며, 그 태동을 몸소 실감하고 있어요.
2024년에는 어떤 작업을 처음 소개할 예정인가요? 다시 한번 목공예를 선보이려 합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드는 박경윤 작가의 작업으로요. 하나하나 직접 깎아 만들어낸 결이 무척 섬세하고 우아해요. 동시에 기능에도 충실하죠. 다가오는 2월, 모순의 1주년을 기념해 전시를 오픈할 예정이니 기대해주세요.

 

에디터 손지수(jisuson@noblesse.com)
사진 표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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