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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3

지금, 우리 이야기

<벚꽃동산>의 연출가 사이먼 스톤과의 대화.

사이먼 스톤(Simon Stone). 지금 세계 연극 신에서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이름 중 하나다. 2007년 극단 해이로프트 프로젝트를 창단하며 연출가로 데뷔한 그는 2011년 스위스 벨부아 극장 상임 연출가 시절 헨리크 입센의 <들오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영국 내셔널 시어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 네덜란드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ITA) 등 세계 최고 무대를 오가며 <메디아>, <예르마>, <입센 하우스> 등 고전을 해체해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이어왔다.
사실 고전을 모티브로 한 작품은 수없이 많다. 과거 명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 역시 연극이나 영화 분야에서는 익숙한 연출 방식이다. 그럼에도 사이먼 스톤이 주목받는 이유는 고전이 시사하는 바를 꿰뚫는 남다른 통찰력과 이를 현대에 재현하는 것을 넘어 우리 주변 어디에서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 이끌어내는 능력 덕분일 것이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비극 <예르마>에서 아이를 갖지 못해 좌절하던 안달루시아 농부의 아내는 그의 무대 위에서 여러 차례 난임을 시술했음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분노하는 성공한 현대 여성으로 변신했고, 에우리피데스의 고대 그리스 비극 <메디아>의 주인공은 잘나가는 의사이자 헌신적 아내였지만 남편의 외도로 모든 것을 잃는 인물로 그려졌다.
사이먼 스톤이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신작을 선보인다. 공연을 올릴 도시에서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을 기반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그가 이번 무대를 위해 선택한 고전은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 1905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 시대를 배경으로 급변하는 사회를 그린 작품이 역동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사회와 잘 어울린다는 판단에서다. 2024년 서울 버전의 <벚꽃동산>을 위해 그는 원작 캐릭터에 새로운 한국 이름을 부여하는 한편, 몰락해가는 귀부인 류바에 해당하는 ‘송도영’ 역에 배우 전도연을, 농노에서 부유한 상인이 되는 로파힌을 재해석한 ‘황두식’ 역에 배우 박해수를 캐스팅했다. 특히 <리타 길들이기> 이후 27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해 화제를 모은 전도연은 제작 발표회에서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거절하려 했는데, 사이먼 스톤이 ITA에서 공연한 <메디아> 영상을 보고 배우로서 피가 끓어올랐다”며 출연 이유를 밝혔다. 5월, 연습이 한창인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사이먼 스톤을 만났다. 6월 4일부터 한 달가량 이어질 공연을 위해 4월 초부터 한국에 머물며 작업 중인 그는 작품의 배경인 서울에 온전히 스며든 듯 보였다.





<벚꽃동산>에 출연하는 전도연, 박해수 배우.

공연할 도시에 직접 머물며 작품을 완성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서울에서 지낸 지 한 달 정도 됐는데,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공연을 준비하거나 좋은 식당, 바를 찾아다니고 있어요. 시장에서 장을 보기도 하고, 거리에서 산책도 하며 평범한 시간을 보내고 있죠. 가족과 함께 지내는데, 세 살 된 딸이 집에만 있으면 지루해해서 매일 새로운 놀이터가 될 만한 공간을 찾아다니고요.(웃음) 관광객이 아닌, 이 도시에서 계속 살아온 것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국립극장에서 ITA 연극 <메디아>를 상영하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실제 무대를 선보이는 건 처음이에요.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3년 전쯤 가까운 동료이자 친구인 ITA 예술감독 바우터 반 란스빅(Wouter Van Ransbeek)과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세계 여러 나라 극장에서 많은 공연을 했는데, 더 원하는 무대가 있냐”고 묻기에 “한국에서 공연해보고 싶다”고 했죠. 그 말을 들은 바우터가 여러 차례 함께 작업해 인연이 깊은 LG아트센터 서울에 저를 소개해주었어요.
한국에서 공연하고 싶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2002년 멜버른 필름 페스티벌에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보고 충격받은 이후 지금까지 200편이 넘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했어요. 그만큼 K-컬처에 관심이 많고, 특히 한국 배우들과 작업하고 싶은 바람이 늘 있었죠. 요즘 서울을 보면 셰익스피어 시대의 런던 혹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가 떠오릅니다. 셰익스피어가 희곡을 쓸 당시 영어는 200년밖에 안 된 언어였고, 영국은 혁명 시기를 지나 경제적 호황기를 맞은 상황이었어요. 지금도 전 세계 무대에서 공연되는 위대한 희곡이 이 시기에 탄생했죠.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연극도 마찬가지예요. 오랜 정치적 불안정을 끝내고 부를 어느 정도 축적한 시점, 아테네에서 굉장히 단기간에 연극의 바이블이라 할 만한 엄청난 작품이 쏟아져 나왔어요. 근래 K-컬처가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 관심을 받는 것을 보면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흥미롭고 의미 있는 문화적 혁명이 일어나는 듯해요. 그 혁명에 동참하고 싶었습니다.(웃음)
특히 K-컬처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나요? 예술가들은 언제나 인간의 복잡한 내면에 관심이 많습니다. 모든 사람은 일종의 ‘광기’를 품고 살아가는데, 이에 대한 문화적 이해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위대한 예술이 탄생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경우 전쟁이나 침략 같은 절망적 상황을 거치면서 이런 광기를 자연스레 수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듯해요. 미치는 것만이 제정신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인 시기를 견뎌낸 사회가 지닌, 복합적이고 쉽게 예측할 수 없는 매력이 있죠. 여기에 단기간 이뤄낸 경제성장이 시너지를 이루며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로 발현된 것 같아요.
고전을 해체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으셨어요. 대다수 작업이 스토리의 큰 흐름 외 고전이라는 것을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현대적 요소를 잘 반영하는데, 각색 비결이나 노하우를 들려줄 수 있나요? 매일 4~5시간씩 다양한 신문을 읽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기 위해서죠. 영화와 연극 모두 시대상을 반영하는 만큼 연출가라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당연히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연출가 대다수가 커리어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고전을 하나둘 섭렵하는데, 제 경우 열다섯 살 때부터 하루 평균 다섯 권의 희곡을 읽었어요. 당시 아역 배우로 활동했는데, 열심히 연습해도 오디션 기회가 오지 않아 절망한 채 집에서 혼자 엄청 많은 책을 읽었죠. 고전 속 모든 인물을 역할 놀이하듯 소리 내 연기하곤 했는데, 그때 읽은 작품이 여전히 머릿속에 카탈로그처럼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을 먼저 정하고 현대에 맞춰 각색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접했을 때 머릿속 고전이 ‘이번엔 내 차례’라며 손을 흔듭니다.





“고전은 사람들에게 ‘이런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고통받는 것 역시 당신이 처음이 아니다. 과거에도 이미 있었던 일이고 우리는 그걸 되풀이하고 있다’고 알려준다고 생각해요.”

많은 고전 중 한국과 어울리는 작품으로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떠올린 이유가 궁금합니다. 팬데믹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 서울을 방문했는데, 그때 작품을 결정했어요. 머무는 동안 연출가, 배우 등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벚꽃동산>이 떠오르더군요.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서울은 정말 흥미로운 도시예요. 미래가 어디로 흘러갈지 치열하게 고민하죠. 그런 모습이 1905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시대와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당대 귀족에 대한 인식 등 원작의 배경이 되는 사회적·정서적 요소를 2024년 한국 버전으로 각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이를 위해 어떤 시도를 하고 있나요? 저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나 영국 케임브리지,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성장기를 보냈어요. 영어와 독일어가 모국어죠. 새로운 나라로 이사할 때마다 모든 것을 빠르게 흡수하고 배워야 했어요. 그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다른 문화권을 접하면 가능한 한 많이 배우고 체득하려 합니다. K-콘텐츠를 보는 것은 물론, 한국의 역사도 공부하고 있고요. 디테일은 작업 방식을 통해 보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효율적 작업을 선호해 텍스트를 유연하게 열어두는 편이거든요. 밑그림을 스케치하듯 큰 흐름만 잡아두고, 배우나 스태프와 의논하며 필요에 따라 변형하거나 수정하는 거죠. 제 대본은 장소, 원작, 경험 세 가지 요소로 이뤄집니다. <벚꽃동산>의 경우 서울이라는 배경, 체호프의 희곡, 이곳에서의 제 경험이 교차하는 거죠. 이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서울을 그려나가는 데 함께하는 배우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해요. 실제 배우의 삶과 경험에 기반해 캐릭터를 만들어나가기 때문입니다.
배우의 경우 캐스팅 자체로 상당한 화제가 되고 있어요. 특히 전도연 배우를 27년 만에 연극 무대로 이끌었는데, 배역을 정할 때 어떤 부분에 신경 쓰나요? 일단 배우로서 역량이 뛰어나야 합니다. 더불어 인격적으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하고요. 무대에 섰을 때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사람들을 찾아내려 해요. 사실 제게 배역을 정하는 건 그리 어려운 과정이 아닙니다. 작품이 정해지면 각 캐릭터에 어울리는 배우가 자연스레 떠오르거나, 적합한 인물을 금세 알아볼 수 있거든요. 이번 작품의 경우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 같은 인물이 필요해 많은 영화에서 연기를 접해온 전도연 배우에게 제안했어요. 박해수는 가장 좋아하는 한국 배우인데,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굉장히 다양한 얼굴을 지녔죠.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연출가로서 관객에게 거울이 될 만한 작품을 올리고 싶습니다. 고전은 사람들에게 ‘이런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고통받는 것 역시 당신이 처음이 아니다. 과거에도 이미 있었던 일이고 우리는 그걸 되풀이하고 있다’고 알려준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완벽하게 새롭지 않고, 그 사실은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주죠. 작품을 통해 ‘내 인생도 의미가 있구나’ 하는 희망을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사진 조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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