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에서 셰익스피어까지
혁명과 통일의 흔적, 망명과 신화를 품은 도시의 기억을 예술로 펼치는 베로나 근대미술관.

매년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열리는 아레나 오페라 축제로 한 해를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베로나. 원형경기장은 고대 로마가 2000년 뒤 후손에게 전한 위대한 유산이다. 또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장’이라는 타이틀 덕에 연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다음 차례는 무엇일까? 나는 산타 아나스타샤 대성당에 있는 피사넬로의 프레스코화를 꼽고 싶다. 르네상스 초기 화가 피사넬로는 피사에서 태어났지만, 베로나에서 자라고 배웠다. 그는 베네치아와 만토바 등지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이사이 베로나로 돌아왔고, 이 성당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림은 성(聖) 조르조가 귀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용(龍)을 퇴치하기 위해 원정길에 오르는 장면이다. 세월이 흘러 빛바랬음에도 용사의 기백과 여인의 아름다움, 그리고 배경과 세부 묘사가 마치 막 일어날 일처럼 심장을 뛰게 한다. 기사가 응시하는 건너편의 용은 이슬람 세력 또는 베로나를 겁박한 베네치아로 추측되지만, 사실이야 어쨌든 낭만적 출사표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베로나가 키운 화가의 존재감이 가장 돋보이는 그림으로 꼽고 싶다.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독립운동)를 대표하는 조각가 알레산드로 푸티나티도 이곳 태생이다. 그의 ‘마사니엘로(Masaniello)’는 밀라노 근대미술관 전시실 입구에서 오늘도 민심의 횃불을 들고 서 있다. 17세기 나폴리 어부 마사니엘로는 총독의 불의에 항거해 민중의 봉기를 이끌었다. 뒷날 프랑스 작곡가 다니엘 오베르는 그랜드 오페라의 효시로 꼽히는 <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La muette de Portici)>를 통해 어촌의 혁명 전사를 다시금 불러냈다. 비록 원작은 밀라노에 내줬지만, 베로나 근대미술관도 푸티나티의 미니어처로 관람객을 맞는다. 이는 1830년대에 발명된 3차원 복제기를 통해 조각을 탁상용 소품으로 양산한 결과물이다. 이렇게 혁명과 더불어 ‘예술 복제 시대’가 왔다.



아래쪽 우고 찬노니의 단테상과 오른쪽 주세페 페라리의 ‘베로나 옛 시장 안뜰’.
독립과 통일을 향한 예술의 서사
조각의 ‘마사니엘로’만큼 리소르지멘토를 상징한 회화가 프란체스코 아예츠의 ‘곱씹음(La Meditazione)’이다. ‘명상’이라는 오역으로는 의미를 짚지 못한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에서 영감받은 ‘곱씹음’은 1848년 밀라노 봉기 실패에 대한 실망감과 재기의 결의를 되새긴다. 여인은 ‘이탈리아 역사’라고 적힌 책과 함께 통일의 걸림돌이자 신앙의 상징인 십자가를 들고 있다. 하이에츠는 십자가에 보일 듯 말 듯 밀라노 봉기의 날짜 닷새를 새겼다. 베로나는 이 그림을 의뢰했음을 더없이 자랑으로 여긴다. 아예츠의 제자 도메니코 인두노는 훨씬 밝은 분위기로 독립을 낙관했다. ‘이긴 내기’에서 여인은 험한 언덕배기 아래로 손수건을 흔들며 승리의 기쁨을 전한다.
베로나 사람이라면 이곳이 피렌체에서 쫓겨난 단테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망명지라는 사실을 모를 수 없다. 단테는 자신을 받아준 칸그란데 1세에게 <신곡>의 ‘천국편’을 헌정했다. 단테의 탄생 600주년을 앞두고 베로나는 그의 조각상 공모전을 열었다. 베로나 안팎의 도전자 일곱 명 중 우고 찬노니(Ugo Zannoni)가 뽑혔다. 문제는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오스트리아가 단테를 이탈리아 문화의 정체성으로 간주하고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동상 제막은 사전 검열을 피해 1865년 5월 14일 새벽 4시에 거행되었다. 광장의 조각상을 축소한 미술관 내 청동상이 피에트로 로이의 ‘베로나의 연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찬노니에 앞선 또 한 사람의 베로나 천재 조각가가 그의 짧은 생애를 바친 창작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토르콰토 델라 토레(Torquato della Torre)는 비단 작품만이 아니라 생명을 통일에 헌신한 예술가였다. 그는 밀라노 5일 혁명에 직접 가담했고, 가리발디 장군의 붉은 셔츠 부대 일원으로 참전했다. 그는 부상을 당한 뒤 베로나로 돌아와 결혼했지만, 1년 만에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겨우 38세였다. 어쩌면 델라 토레가 요절한 덕분에 베로나가 그의 작품을 상당수 소장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었다면, 밀라노가 그의 성공을 빨아들였을 테니까. ‘난교(L’Orgia)’ 또한 <신곡>의 ‘지옥편’ 중 지옥의 입구에 새겨진 “나를 통해 타락한 영혼들 사이로 들어간다”라는 구절의 형상화다. 해골과 뱀이 새겨진 의자에 타락한 여인이 성경을 밟고 앉았다. 탕녀는 압제하의 이탈리아이며, 성경은 적과 결탁한 교황을 은유한다. 델라 토레의 <신곡> 주인공이 줄을 잇는다.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과 아들 가운데 따로 만든 ‘가도’ 또한 지옥에서 왔다.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된 우골리노는 아들, 손자와 함께 옥에 갇혔다. 이어 배식까지 중단되자 굶주림의 공포가 이들을 덮쳤다. 손을 물어뜯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자기 살을 드시라고 했다. 가도가 먼저, 이어 다른 아이들이 모두 죽은 뒤 단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슬픔보다 굶주림이 더했다.” 뒷일은 상상에 맡긴다는 뜻이다.

아래쪽 밀라노 근대미술관을 대표하는 주세페 볼페도의 ‘제4계급’.
근대의 빛을 따라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이탈리아에는 통일이라는 지속적인 과제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낙관적인 화풍이다. 베로나에서 가장 반가운 그림 중 하나는 조반니 세간티니의 스케치였다. 목동이 앉아 피리를 불고, 그 옆에는 연인이 누워 있다. 제목은 ‘입맞춤 뒤’. 나는 이 목동이 취리히에서 본 같은 화가의 ‘알프스 목초지’에서 잠든 소년과 동일인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다. 어쩌면 화폭 바깥에 여자친구가 누워 있을지도. 세간티니, 지난달 살펴본 ‘제4계급’의 작가 주세페 볼페도와 함께 분할주의 유파를 이끈 안젤로 모르벨리(Angelo Morbelli)의 대표작 ‘나아간다(S’avanza)’가 시선을 끈다. 안락의자에서 책을 바닥에 떨군 채 먼 풍경과 마주한 여인. 죽음의 불안과 관조하는 망중한이 공존한다.
대중에게 서양미술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인상주의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에 앞서 유사한 화파가 탄생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리발디와 전장을 누비던 화가들은 눈부신 자연,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고달픈 민중의 삶을 마주하며 느낀 바를 캔버스에 옮겼다. 마키아이올리(Macchiaioli)는 ‘얼룩’이라는 말에서 온 기법이다. 서로 다른 색의 얼룩을 병치해 빛과 그림자를 대조한 기법은 사실상 인상주의와 같은 시도였고, 시기상으로 10년 이상 앞선다. 알려지지 않은 걸작을 하나씩 만난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무명인 까닭은 여럿이다. 많은 화가가 생활고로 요절했다. 작품도 화상을 통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개인 소장에 머물렀기에 미국이나 부유한 유럽 국가에 팔려나가지 못했다. 뒷날 무솔리니가 민족주의를 독점한 탓에 마키아이올리의 예술성은 오염되고 말았다.
드디어 나는 ‘곱씹음’만큼 중요한 미술관의 보물 앞에 섰다. 펠리체 카소라티(Felice Casorati)의 ‘기도(La preghiera)’는 외부에 대여되었다가 재설치 중이었고, 한동안 기다린 끝에 관람의 행운이 돌아왔다. 피에몬테 출신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 전후를 베로나에서 보낸 카소라티는 1910년 베네치아에서 본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에서 받은 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장식적이고 상징적인 분리파의 특징에 화가는 이탈리아의 염원을 담았다. 꽃밭 위 여인은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연인이며, 보티첼리와 아예츠의 모델이자 베르디와 베리스모 작곡가들이 온기를 불어넣은 프리마돈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베로나 근대미술관을 유럽 유수의 미술관과 비교할 수는 없다. 밀라노와 로마의 자매 미술관에 견주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곳에는 베로나가 있다. 발다사레 론게니가 점묘법으로 그린 ‘베로나의 파노라마’는 실경 그대로인 반면, 비토리오 아반치의 ‘옛 시장 계단’을 보면 현재 미술관인 라조네 궁전의 계단에 과거 지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를로 페라리의 ‘에르베 광장’에 서 있는 종탑과 생기발랄한 군중은 반드시 자리를 지켜야 한다. 약탈이나 착취한 것이 아니라 작가와 소장자들이 시민을 위해 기증한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돈으로 살 수 없는 ‘아우라’에 발목을 잡힌다. 인노첸초 프라카롤리의 ‘상처 입은 아킬레스’가 된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