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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에 깊이 뿌리내린 예술은 빛과 흙, 비바람을 양분 삼아 강인한 생명력을 피워낸다. 순환하는 계절의 서사를 품은 예술과 배경이 아닌 작품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연. 화이트 큐브를 벗어난 현대미술의 가장 극적인 파동을 마주할 수 있는 일곱 여행지를 엄선했다.

Photo by Brendon Campos.

INHOTIM, BRAZIL

브라질 남동부의 작은 마을 브루마지뉴에는 갤러리와 숲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과 식물의 동시대적 공존을 탐구하는 거대한 실험실이 숨어 있다. 습윤한 대서양 우림과 건조한 열대 사바나 생태계가 교차하는 약 42만 평의 대지 위에 혁신적 현대미술 컬렉션이 어우러진 미술관 겸 식물원, ‘이뇨칭’이 그 주인공이다. 브라질 광산업계의 대부이자 아트 컬렉터인 베르나르두 파스의 오랜 염원이 깃든 공간으로, 2006년 오픈 직후 미술관이라는 개념 자체를 흔들 정도로 국제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드넓은 정원 곳곳에 20여 개의 독립 파빌리온과 갤러리가 자리하는데, 사실상 애호가들이 열광하는 하이라이트는 청량한 열대 숲을 무대로 20여 점의 조각과 설치 작품이 놓인 야외 전시 공간이다. 특히 엘리우 오이치시카, 쿠사마 야요이, 크리스 버든 등 현대 미학을 선도해온 대가들의 작품은 자연의 호흡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하는 예술의 드라마틱한 면모를 펼쳐 보인다. 이뇨칭의 2026년은 좀 더 특별하다.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예술, 자연, 교육’이란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다양한 연중 프로그램을 기획한 덕분이다. 공간의 역사를 되짚고 미래를 조망하는 20주년 특별전을 비롯해 설치미술가 라이스 미하의 대형 신작 공개, 최근 확장 공사를 마친 시우두 메이렐리스 갤러리 재개관 등 어느 때보다 풍성한 소식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공간 안팎을 누비며 보물찾기하듯 예술을 찾아 나서는 여정도 좋지만, 이뇨칭의 또 다른 정체성이 식물원이란 사실도 놓치지 말 것. 대륙을 넘나들며 수집한 4300여 종의 희귀 식물이 경이로운 예술 산책에 짙은 초록의 숨결을 더해준다.

Courtesy of UCCA Center for Contemporary Art.

UCCA DUNE, CHINA

누구든 ‘UCCA’ 듄을 처음 마주했을 때 단번에 그 정체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지형의 일부인 양 해안가의 모래언덕 속에 잔뜩 몸을 웅크린 까닭이다. 다만 눈에 보이는 면적이 적을수록 모래와 수풀 사이로 감춘 공간의 존재감은 오히려 더 형형하게 드러난다. 자연과 건축의 아슬아슬한 접점, 그 틈새를 파고드는 건 다름 아닌 예술이다. 실제로 UCCA 듄은 중국의 UCCA 현대미술센터가 베이다이허의 예술 공동체 ‘아란야(Aranya)’와 손잡고 선보인 지역 최초의 현대미술관이다. 혁신적 건축사무소로 명성 높은 오픈 아키텍처가 설계를 맡았는데, 모래사장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모티브 삼아 사구 아래 터널을 뚫고 서로 연결된 동굴 형태의 구조를 완성했다. 수천 년간 바람과 파도가 빚어낸 모래언덕을 훼손하는 대신 그 내부를 파내 930㎡ 규모의 미술관 공간을 조성한 것. 총 10개의 실내외 갤러리가 세포처럼 얽혀 있는 한편, 여러 방향으로 낸 천창이 태양의 궤적과 계절의 변화마저 전시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점이 인상적이다. 시시각각 환경에 조응하는 공간미는 개관 이후 꾸준히 인류와 자연의 관계에 집중해온 미술관의 기획 방향과도 닿아 있다. 올해 역시 조각가 킴 림의 회고전을 필두로 양신광, 케이티 패터슨 등 대지의 물성을 탐구하거나 우주의 시공간을 고찰하는 현대미술 작가의 전시가 이어질 예정이다. 무엇보다 UCCA 듄은 풍경 속에 온전히 녹아든 ‘고요한 안식처’를 꿈꾼다. 인류 최초의 거주 환경이자 창작 현장인 태초의 동굴처럼, 지극히 원시적인 안온함이 예술과 건축, 자연을 하나의 공기로 엮는다.

Photo by Florian Holzherr. Copyright James Turrell.

TA KHUT, URUGUAY

우루과이의 활기찬 바닷가 마을 호세이그나시오를 전 세계 예술 애호가들에게 새롭게 각인시킨 이름이 있다. ‘제임스 터렐’ 그리고 ‘타 쿠트’다. 부티크 호텔 포사다 아야나의 정원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타 쿠트는 고대 이집트어로 ‘빛’을 뜻하는 이름 그대로, 빛의 물성을 이용해 인간 내면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제임스 터렐 특유의 몰입형 설치 공간이다. 2021년 호텔 소유주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코플러 부부가 터렐과 2년 넘게 협업한 끝에 선보인 남미 최초의 독립형 스카이스페이스 작품이기도 하다. 그간 터렐은 대륙을 오가며 80개가 넘는 스카이스페이스 연작을 선보였는데, 세계 각지의 문화와 전통을 하나의 건축적 대화로 엮어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의미는 한층 깊다. 피라미드와 불탑 구조를 결합한 건축양식도 눈에 띄지만, 이탈리아산 대리석의 고전적 우아함과 붉은 화강암 바닥이 상징하는 미국 서부의 거친 생명력이 남미대륙에서 이뤄낸 조화 역시 특별하다. 물론 이 공간의 진정한 주인공은 고대 신전 같은 건축물도, 정교한 조명 연출도 아닌 호세이그나시오의 밤하늘이다. 경건하게 뚫린 돔 천장의 원형 프레임이 단순히 관람객에게 하늘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늘을 실내 공간으로 끌어내려 손에 닿을 듯 오롯한 빛의 캔버스로 변화시킨다. 특히 일몰 무렵, 섬세한 인공조명이 자연광과 뒤엉켜 벽면을 타고 흐를 때면 밀도 높은 대서양의 바람마저 예술의 일부가 되는 초현실적 시공간을 체험할 수 있다. 내면의 빛을 깨우는 고요한 사색의 순간이 어김없이 그 뒤를 따른다.

Photo by Allan Pollok-Morris. Courtesy of Jupiter Artland.

JUPITER ARTLAND, UK

거칠고 혹독한 환경일수록 살아남은 생명의 존재감은 더 선명해지는 법. 스코틀랜드의 변덕스러운 기후, 잦은 비바람과 안개마저 예술의 둥지로 끌어들인 ‘주피터 아트랜드’가 우리 앞에 증명해낸 명제다. 에든버러 근교에 위치한 이 조각 공원은 단순히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이 대지 그 자체가 되는 남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2009년 자선가이자 아트 컬렉터인 윌슨 부부가 설립했는데, 개인 컬렉션의 ‘공유’ 방식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미 세계적 예술 공간으로 성장한 지 오래다. 특히 14만 평이 넘는 숲과 초원 곳곳에 자리한 찰스 젱크스, 트레이시 에민, 애니시 커푸어, 앤터니 곰리 등 거장의 조각 작품은 엄밀히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생명체나 다름없다. 모든 창작 프로젝트가 철저히 대지에 씨앗을 심는 형태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창작자들이 수개월간 숲속을 마음껏 누비며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낸 뒤, 오직 그곳만을 위한 작품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식이다. 그 덕분에 30여 점의 작품이 흩어진 공원 구석구석 평범한 야외 갤러리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야생의 긴장감이 가득하다. 비가 쏟아질 때마다 앤터니 곰리의 철제 조각이 녹슬면서 점점 땅과 닮아가고, 바람이 거셀수록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종소리는 더 아득히 울려 퍼진다. 대자연이 예술에 수혈한 우연의 미학은 관람객에게도 고스란히 통용된다. 주피터 아트랜드는 어떤 동선이나 목적지도 제안하지 않는다. 그저 자유롭게 길을 잃고 헤매다가 문득 풍경이 작품으로 변모하는 순간, 그리하여 예술과 자연의 경계가 무너지는 영원 같은 순간을 목도하게 한다.

Courtesy of Trentino Marketing–Pierluigi Orler Dellasega.

ARTE SELLA, ITALY

어떤 예술은 담담히 생과 사를 자처한다. 시대를 초월해 영속하는 불멸의 특권을 버린 채 세월의 풍파에 깎이고 흩어져 끝내 흙으로, 숲으로, 자연으로 돌아간다. 엄격한 자연 통합형 전시 공간으로서, ‘아르테 셀라’가 추구하는 예술의 완성이란 바로 그 순환하는 삶의 여정에 있다. 1986년 창립된 이래 40년간 세계 각지의 아티스트를 알프스 자락에 불러 모아 오직 자연에서 얻은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을 자연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이 프로젝트의 성과는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 트렌티노 지역의 숲과 계곡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그간 다양한 장르의 작가가 저마다 흙과 돌, 잎, 나뭇가지 같은 유기적 재료로 선보인 작품들은 계절을 삼키며 공정하게 나이를 먹는다. 갓 심은 묘목처럼 쑥쑥 자라기도 하고, 폭우에 휩쓸려 형태가 무너지거나 뒤틀리기도 하면서 조금씩 숲의 일부가 되어간다. 이를테면 21세기 대지 미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줄리아노 마우리의 ‘Cattedrale Vegetale’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뭇가지 구조물은 썩고 그 안의 나무들이 자라면서 자연스레 천장과 벽을 형성하는, 일명 ‘성장하는 건축물’이다. 나무가 타고난 생사의 굴레를 그대로 짊어진다는 점에서 자연의 일부나 다름없다. 아르테 셀라는 지금도 매년 새로운 작가를 초청하거나 기존 작가와 협업을 이어가는데, 최근 들어 마리오 쿠치넬라, 스테파노 보에리, 구마 겐고 등 건축 거장의 참여가 잦아졌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끊임없이 작품이 태어나고 부패하는 순리의 공간, 매 순간 삶이 갱신되는 이 현재진행형 숲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으로써 예술에 진정한 생명을 부여한다.

Courtesy of Voyages Indigenous Tourism Australia.

FIELD OF LIGHT, AUSTRALIA

붉은 사막에 어둠이 내리면 짙은 그림자 위로 빛의 꽃잎이 피어오른다. 연한 빛줄기가 마치 지구의 심장박동처럼 번지며 사막의 밤을 켜켜이 점령해간다. ‘호주의 영혼’이라 불리는 울룰루 일대가 거대한 전시 공간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실제로 ‘필드 오브 라이트’는 영국계 호주 아티스트 브루스 먼로가 비 온 뒤 한껏 생명력을 터뜨리는 사막의 야생화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몰입형 예술 작품이다. 호주 중심부에 위치한 축구장 7개 규모의 광활한 부지를 5만 개의 태양광 줄기로 밝히는데, 가느다란 줄기 하나하나가 꼭 살아 있는 식물처럼 미풍에 흔들리며 내내 섬세한 결을 유지한다. 무엇보다 이 빛무리가 기념비적 대지 미술 작품으로 평가받는 건 어둠을 틈타 풍경을 현혹하거나 자연과 경쟁하지 않기 때문. 오히려 울룰루의 장엄함에 경의를 표하며, 예술이 이 땅에 바치는 가장 경건한 헌사로서 존재한다. 2016년 오픈 당시만 해도 임시 설치 프로젝트로 예정돼 있었으나 수십만 관람객의 찬사에 힘입어 그간 몇 차례나 수명이 연장됐다는 점도 흥미롭다. 현재 확정된 전시 기간은 2029년 12월까지다. 애초에 영구 설치를 염두에 두지 않은 데다 사막의 거친 기후를 견뎌야 하기에 작품의 수명을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았지만, 2024년 말 대규모 보수 작업을 마친 덕분에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빛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다. 올해 탄생 10주년을 맞은 필드 오브 라이트의 또 다른 이름은 ‘Tili Wiru Tjuta Nyakunytjaku’. 지난 수만 년간 이 지역에 뿌리내린 아낭구 부족의 언어로 ‘수많은 아름다운 빛을 바라보다’라는 의미다.

Courtesy of Lance Gerber.


DESERT X, USA & SAUDI ARABIA

“사막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어 있지 않다.” 미국 모더니즘의 거장 조지아 오키프가 인터뷰를 통해 남긴 말이다. 언뜻 무용해 보이는 광활한 황무지 아래 가장 원초적인 대지의 힘을 간직한 땅. 그 메마른 바위틈이며 모래바람 속에 깃든 지구의 열기와 생명력은 예로부터 세계적 예술가들이 사막으로 시선을 돌린 이유이기도 하다. 2017년 미국 서부의 코첼라밸리에서 시작된 ‘데저트 X’는 오늘날 현대미술이 어떤 방식으로 사막과 교감하고 소통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예다. 캘리포니아의 비영리 단체 ‘더 데저트 비엔날레’가 프로젝트를 주관하는데, 사막의 지리적 조건과 환경, 원주민 공동체에 의미 있게 반응하는 ‘장소 특정적’ 미술 전시를 제1원칙으로 삼는다. 즉 특정 장소와 조화를 이루도록 섬세하게 기획하고 배치한 예술 작품을 통해 사막의 생태적 · 문화적 · 정신적 요소까지 작품의 일부로 담아내는 것이 목표다. 2020년부터는 코첼라밸리 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알울라의 고대 사막 지대를 개척해 번갈아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참고로 애그니스 디니스, 마리아 마그달레나 캄포스-폰스, 타렉 아투이 등 여러 장르의 선구자 11인이 참여한 ‘데저트 X 2026 알울라’는 최근 막을 내렸지만, 이번 시즌을 놓쳤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프로젝트 10주년을 기념하는 ‘데저트 X 2027 코첼라밸리’가 그 어느 때보다 야심 차게 준비되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내년을 새로운 진화의 기점으로 삼은 데저트 X는 개막 시기를 가을로 옮기고 프로그램을 겨울과 봄까지 연장해 사막의 변화하는 빛, 기후, 생태계와 더욱 깊이 교감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