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에서 시작해 세계로 뻗어간 예술
“아버지에게 그림은 삶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영화감독 로렌조 비가스가 들려주는 아버지 오스왈도 비가스의 예술과 기억


중남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예술가 오스왈도 비가스(Oswaldo Vigas)의 대규모 회고전이 중국 광저우 광둥미술관(Guangdong Museum of Art)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Oswaldo Vigas: Reality Is What I Imagine》은 70여 년에 걸친 작가의 예술 여정을 회화와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조명합니다. 2026년 8월 15일부터 11월 22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아시아에서 오스왈도 비가스의 작품 세계를 주요 미술관 규모로 소개하는 첫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1923년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난 오스왈도 비가스는 유럽 모더니즘을 경험하면서도 라틴아메리카의 신화와 선주민 문화, 고대의 상징을 작품의 중요한 토대로 삼았습니다. 구상과 추상을 자유롭게 오가며 자신만의 시각 언어를 구축한 그는 어느 한 사조나 양식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작가입니다. 이번 전시는 서로 다른 문화와 미학 사이를 넘나드는 그의 태도를 ‘양서류적 모더니티(Amphibian Modernity)’라는 개념으로 조명합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오스왈도 비가스의 아들이자 영화감독인 로렌조 비가스(Lorenzo Vigas)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영화 《From Afar》로 2015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그의 시선은 거장의 작품 세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캔버스와 책, 음악, 사람들의 대화로 가득했던 작업실. 그곳에서 그림은 특별한 순간에만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였습니다. 아버지의 창작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경험은 로렌조 비가스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버지는 왜 한 가지 양식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베네수엘라의 문화적 뿌리는 어떻게 세계와 연결될 수 있을까. 가족의 기억에서 출발한 대화는 예술적 자유와 창작의 본질, 서로 다른 문화를 잇는 예술의 가능성으로 이어집니다.

《베네수엘라의 마녀들: 오스왈도 비가스 회화전(Venezuelan Witches: Oswaldo Vigas Paintings)》 준비 현장의 오스왈도 비가스.
아들이자 영화감독으로서 아버지 오스왈도 비가스를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어린 시절 작업실에서 보낸 시간도 궁금합니다. 아버지는 삶에 온전히 몰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족과도 매우 가까웠고 우리는 좋은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작업실이 생각납니다. 그곳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고 책과 음악, 대화와 아이디어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예술가와 작가, 친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죠.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아버지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는 점입니다.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결과를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업을 이어가면서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발견해 나갔습니다.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창작을 대하는 태도는 제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결과를 미리 정해두기보다 과정 자체를 믿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버지에게 그림은 삶과 분리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오스왈도 비가스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무엇부터 눈여겨보면 좋을까요? 구상과 추상을 자유롭게 오간 그의 작업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아버지의 자유로움과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하나의 사조나 정의 안에 가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구상과 추상, 서로 다른 양식과 사고방식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죠. 그러면서도 자신의 뿌리와는 늘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방식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그 공식을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필요하다면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머무르기보다 스스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태도가 아버지의 작품을 끊임없이 변화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는 서로 다른 문화 사이를 오가는 아버지의 예술을 ‘양서류적 모더니티(Amphibian Modernity)’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 표현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버지는 언제나 서로 다른 세계 사이를 오갔습니다. 베네수엘라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지만 파리에서 12년을 보냈고 당시 국제 미술계의 흐름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아버지는 이 두 세계를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메스티소(mestizo) 예술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네수엘라 역시 여러 문화가 만나 형성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유럽과 원주민, 아프리카의 문화적 영향이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다른 하나를 배제하지 않고 작품 안에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미술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가브리엘라 랑헬이 제시한 ‘양서류’라는 표현은 그런 면에서 흥미롭습니다. 아버지는 하나의 정체성만 선택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서로 다른 환경을 오갈 수 있었습니다.
* 메스티소(Mestizo): 유럽계와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인 또는 그 후손을 가리키는 말. 라틴아메리카의 혼합된 문화적 정체성을 설명할 때도 사용된다.


아버지와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영화 《From Afar》와 《La Caja》에서는 ‘부재하는 아버지’라는 주제가 반복됩니다. 그 간극은 어디에서 비롯됐나요?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실제 아버지와의 관계는 제 영화에 등장하는 관계와 정반대였거든요. 아버지는 제게 한 번도 부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가까웠습니다. 영화 속 아버지의 부재는 다른 곳에서 비롯됐습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문화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관계에 자리한 ‘부재하는 아버지’라는 원형에 끌렸던 것 같습니다. 왜 이 주제가 제 안에서 그토록 오래 이어지는지는 저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집착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집착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림으로, 당신은 영화로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버지의 예술은 당신의 창작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우리가 같은 방식으로 예술에 접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 안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영향 중 하나는 무언가를 설명하기보다 탐구하려는 태도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이 정리된 상태에서 그림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무언가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두었습니다. 저 역시 영화를 만들 때 비슷한 방식을 취합니다. 인물과 관계, 감정에 관심이 있지만 관객에게 무엇을 생각하거나 느껴야 하는지 일일이 알려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장면도 각자의 기억과 경험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까요. 아버지의 그림을 보며 이미지가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때로는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더 흥미롭습니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작품과 함께 살아온 경험도 궁금합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요? 특정한 그림 한 점보다는 작업실과 집에서 작품들과 함께 살아온 기억이 더 개인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림은 가족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림을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저마다의 생명을 지닌 존재처럼 여기며 자랐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림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나이가 들고 삶의 경험이 쌓이면 같은 작품에서도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도 달라지고요. 그림이 제게 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는 아버지의 작품을 중국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맥락에서 선보입니다. 작품을 다시 바라보며 새롭게 발견한 점이 있나요? 전시는 작품을 어떤 맥락에 놓고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면을 드러냅니다. 아버지의 작품이 새로운 방식으로 함께 놓인 모습을 볼 때마다 작품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이번 중국 전시는 특히 특별했습니다. 아버지가 작업했던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환경에서 작품을 선보이지만 그 안에서 놀라울 만큼 깊은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지녔더라도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이해하고 싶어 하며 자연과 관계를 맺고 기억을 이어갑니다. 이런 질문은 문화의 차이를 넘어 공유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기원을 탐구한 것은 단순히 베네수엘라나 라틴아메리카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뿌리를 깊이 들여다보았기에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관객들이 오스왈도 비가스의 이름이나 전시명으로 삽입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기를 바라시나요? 오스왈도 비가스를 반드시 라틴아메리카라는 맥락 안에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작품은 베네수엘라의 역사와 문화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의 뿌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물려받은 것을 어떻게 자신만의 것으로 바꾸는지 묻습니다. 한국에서 전시를 열 기회가 생긴다면 이러한 연결점을 탐구하고 싶습니다. 고대의 상징과 전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방식은 한국이 자국의 문화유산과 맺어온 관계와도 흥미로운 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관객들이 발견하기를 바라는 것은 단순히 베네수엘라 출신의 예술가가 아닙니다. 자신의 문화적 뿌리를 바탕으로 그 경계를 넘어서는 예술적 언어를 만들어낸 한 예술가입니다.
- 에디터 박재만
- 사진 FITZ & CO, Oswaldo Vigas Foundation™, Getty images, T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