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베니, 장인 박상규를 만나다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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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31

발베니, 장인 박상규를 만나다

발베니가 찾아나선 네 번째 장인, 박상규.

작업 중인 항일운동 기념탑 앞에서,
박상규 장인.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스페인 빌바오에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을 때의 이야기다. 그는 오랫동안 금속으로 건물을 디자인했는데, 잘 휘는 금속의 속성을 이용해 그가 상상하는 공간 그림을 그리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누비이불처럼 올록볼록하게 뽑은 금속을 쓸 참이었는데, 금속이 건물이 반사할 빛을 붙잡아두어 건물의 육중한 부피감을 부드럽게 바꿔줄 거라 기대해서다. 한데 계획했던 납구리는 환경 이슈 때문에 스페인 법률로 금지되었고, 스테인리스강은 원하는 효과를 내는 데 실패했으며, 티타늄은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결국 그는 티타늄 압연을 생산하는 공장을 찾아가 새로운 기계를 고안해야 했고, 새 기계에 맞는 성분 탐색과 심미적, 구조적 특성을 파악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 프랭크 게리의 일화를 늘어놓은 이유는, 금속 주물 전문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서울 사람이라면 살면서 수백, 수천 번은 지나쳤을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뉴스에 숱하게 등장하는 ‘국회’라는 글자가 새겨진 무궁화 조형물, 제헌의원의 청동 부조, 완도 장보고 동상 등 1만 점의 조형물을 만들고 붕괴 위험에 처한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에 새 옷을 입힌 주인공. 이제부터는 금속 주물 장인 박상규의 이야기다. 박상규는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 ‘공간미술’에서 금속 조형물에 관련된 거의 모든 일을 다룬다. 3D 디자인 제작, 2D 설계도 작성, 원형 제작, 모형 제작과 조형물 제작까지. 20여 명의 직원을 진두지휘하는 오너이면서도 여전히 모든 제작 과정에 참여한다.





캐리비안 캐스크에서 숙성한
발베니 14년.

40년간 주물 제작을 해온 박상규를 이천의 작업실에서 만났을 때, 가장 놀란 건 예상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 때문이었다. 백종원이 연상되는 서글서글한 외모에 시종 웃는 얼굴. 피부는 매끈하고 잘 다듬은 금속처럼 반짝였다. “제가 하는 작업을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면 스트레스만 늘잖아요.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한다, 좋다, 재밌다 생각하면 진짜 좋아지거든요. 주변에서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고 묻곤 해요. 책임감을 갖고 하면 되더라고요. 제가 열심히 하면 직원들도 열심히 따라와요. 그래야 일이 깔끔하게 처리되고 저도 신이 나거든요. 결국 즐기면서 해야 오래도록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누워서 티비 보는 느낌으로 작업한다”며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그가 작업에 대해 고민하는 깊이나 열정을 보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2008년부터 노동법을 준수하는 처우를 직원들에게 제공하면서도(이 업계에서는 그전까지 전무했던 일이다). 그 자신은 아침 7시부터 새벽까지 작업에 몰두한다. 인터뷰차 방문한 날도 아침까지 마무리할 일이 있어 뜬눈으로 밤을 보낸 터였다.





장인의 투박한 손에서 더욱 가치 있게 빛나는
금물결의 발베니.

“외국 작가의 작품이에요. 세계 곳곳에서 금속 전문가를 알아보다 원하는 퀄리티를 내는 곳을 못 찾았나 봐요. 물어물어 에이전시를 통해 우리를 찾아왔는데,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네요.”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오브제를 이리저리 매만지며 틈틈이 수정하는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바로 옆에는 엄청난 크기의 철골 작업이 한창이었다.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아래 설치할 항일운동 기념탑입니다. 두세 달 기간을 두고 하는 작업이죠.”
거대한 구조물과 손바닥만 한 오브제가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 풍경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내렸고, 작업이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아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 장인에게 술 한잔이 간절해 보였다. “한잔하시겠어요?” 에디터가 권한 금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발베니 12년 한 잔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빛깔을 보는 모습에서, 주름진 손을 거쳐간 수많은 금속 덩어리를 떠올렸다. 프랭크 게리가 그랬듯, 무한한 가능성만 믿고 한 손에는 비현실적인 설계도를 들고 그를 찾아온 클라이언트가 얼마나 많았을까.
“어려울수록 굉장히 편하게 생각합니다. 그게 제 단점일지 모르겠어요.(웃음)”
그가 하는 작업은 대개 조형물 제작부터 현장 설치까지 완료해야 하는 탓에 늘 예상치 못한 난제에 부딪히곤 한다. 직원들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 홍반장을 호출하는 심정으로 박상규에게 달려간다(인터뷰 중에도 한 직원이 달려왔다).





발베니 실험정신의 집약체,
발베니 17년.

“‘국회’ 글씨가 새겨진 국회의사당의 무궁화 구조물 크기가 3m였어요. 중량만 1톤이 넘었죠. 국회의사당 시설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옮겨야 하는 작업이라 장비를 쓸 수 없었어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면 장비가 없던 시절의 노하우를 가져오는 거예요. 노하우와 직관으로 현장에서 빠른 판단을 하죠.”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우리가 상상한다는 게 감각을 통해 이미 경험했던 일을 되돌아보는 것”이라 말한다. 결국 장인이 순간적으로 발휘하는 기지란 오랜 세월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체득한 것이 아닐는지. 비록 앞에 앉은 겸손한 장인은 “장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라고 말하며 여러 차례 손사래를 쳤지만.
박상규를 만나고 나오는 길, 그가 만든 많은 동상이 길 옆에서 우리를 배웅해주었다. 몇 시간 전 이곳에 들어갈 때만 해도 과시용이라고 짐작한 이 조형물이 사실은 100년, 200년 후에도 끄떡없는 금속을 연구하기 위한 고심에서 나온 거대한 ‘실험장’임을 알고는 짐짓 겸허해졌다. 오늘처럼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이면 그의 실험정신은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발베니에도 삶을 헌신한 구리 세공인 데니스 맥베인이 있다. 발베니 풍미의 한 축을 담당하는 꿀 향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발베니 증류소에서 57년간 일해온 장인 데니스 맥베인이 공들여 관리한 독특한 구리 스틸 덕분이다. 고작 쇳덩어리 하나가 술의 풍미에 보탬이 됐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 발베니를 마시는 많은 이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보이는 곳 너머에서 ‘좀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한 고투로부터 생의 의미를 찾는 장인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에디터 전희란(ran@noblesse.com)
사진 이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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