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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선보인 파격과 혁신의 미학

FASHION

패션을 통해 시대를 말하고 세상을 움직인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창조적 유산.

아이코닉한 타탄체크 패턴을 활용한 룩으로 완성한 1993 F/W 컬렉션. @ngvmelbourne

때때로 패션은 스타일을 넘어 시대의 가치관과 신념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된다. 수많은 말보다 일상 속 티셔츠에 적힌 한 줄의 문장이 더욱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오늘날 패션은 환경, 인권, 정치, 젠더 등 다양한 사회적 담론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플랫폼이 되었지만, 그 가능성을 먼저 체감하고 활용한 인물이 있다. 펑크의 여왕, 영국 패션의 대모, 저항 정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다. 세계적 디자이너이자 적극적인 사회운동가였던 그녀는 패션을 통해 시대에 질문을 던지고 신념을 거리낌없이 표현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패션을 통해 환경보호와 반소비주의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왼쪽 @lucthelabel 오른쪽 @viviennewestwood


1941년 영국 더비셔에서 태어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전후(戰後) 검소하고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훗날 기존 질서와 권위에 도전하고 낭비를 최소화하는 디자인 철학을 갖게 된 것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자리한다. 10대 때 아트 스쿨에 다니기도 했지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위해 사범학교로 옮겼고, 이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녀는 1965년 연인이자 동업자 말콤 맥라렌을 만나면서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로큰롤과 섹슈얼리티, 아방가르드 문화처럼 기성세대 문화에 반하는 것에 깊이 빠져 있던 맥라렌은 웨스트우드가 펑크 스타일을 지향하는 데 일조했으며, 패션이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강력한 매체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웠다. 두 사람은 1971년 런던 킹스 로드에 ‘렛 잇 록(Let it Rock)’을 열고 빈티지 의상을 재해석한 티셔츠와 펑크 스타일을 선보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웨스트우드는 맥라렌이 매니저를 맡은 밴드 섹스 피스톨스의 의상을 제작하는 등 영국 펑크 패션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찢어진 티셔츠, 옷핀, 슬로건 프린트, 페티시즘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디자인은 당시 통상적 패션의 미학을 뒤흔들었고, 젊은 세대의 저항 정신을 대변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전파되었다.
정식으로 패션 교육을 받은 적이 없던 그녀는 독학으로 재단과 복식사를 연구하며 자신만의 디자인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역사와 전통 의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은 비비안 웨스트우드 컬렉션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핵심이 되었다. 1981년에 발표한 파이어리트(Pirate) 컬렉션에서는 18세기 해적 영웅 시대 문화와 영국의 전통적 테일러링,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을 결합해 뉴 로맨틱 스타일을 제안했고, 풍성한 프릴 블라우스와 자카드 팬츠, 이각모는 당시 패션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전통과 혁신의 공존을 추구했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 우드. @trussarchive
1970년대 말콤 맥라렌과 함께 선보였던 본디지 슈트. @thewestwoodarchives
18세기 해적 영웅 시대에서 영감받은 디자인이 돋보이는 1981년의 파이어리트 컬렉션. @viviennewestwood
크리놀린을 미니스커트 형태로 재해석한 1985년 미니크리니 컬렉션. @viviennewestwood


이후에도 그녀의 대담하면서 독창적인 상상력은 역사와 문화, 민속과 예술을 넘나들었다. 북미 원주민 문화에서 영감받은 새비지(Savage), 페루 전통 복식의 요소를 녹여낸 버펄로(Buffalo), 빅토리아 시대 크리놀린을 현대적으로 변주한 미니크리니(Mini-Crini) 컬렉션을 비롯해 해리스 트위드(Harris Tweed)와 파간 I (Pagan I) 컬렉션에서는 타탄체크와 트위드, 왕관, 망토 같은 영국적 상징과 모티브를 새롭게 해석하며 전통을 동시대 감각으로 되살렸다. 이러한 예술성을 인정받아 1990년과 1991년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에 선정됐으며, 1992년과 2006년에는 영국 패션 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오늘날 브랜드를 대표하는 토성 형태의 오브(Orb) 로고 역시 영국 왕권의 상징과 천체를 결합한 모티브로, 웨스트우드가 추구한 전통과 혁신의 공존을 보여주는 디테일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녀의 시선은 런웨이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장됐다. 환경보호와 반소비주의, 인권과 표현의 자유를 꾸준히 공론화하며 디자이너를 넘어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2012년부터는 ‘클라이메이트 레볼루션(Climate Revolution)’ 캠페인을 통해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적극적으로 알렸고, 런웨이에 ‘Save the Arctic’, ‘No Man is an Island’ 같은 슬로건을 등장시키거나 피날레에서 모델들이 환경보호 메시지를 담은 피켓을 들고 걷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패션쇼의 의미를 그녀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정의했다. 또 현시대의 과잉 소비와 패스트 패션을 비난하며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옷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미래와 지속가능성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에게 패션은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행위에 머물지 않았다. 문화와 역사, 사회를 향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변화를 촉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표현 방식이자 독창적 언어였다. 기존 질서와 통념을 과감히 뒤집는 변화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그녀의 펑크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는 패션이 시대를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