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에 비춰 반추한 예술
강원도 원주에 빙하미술관이 새롭게 개관했다.
직관적이면서도 비유적인 이름을 가진 이곳에서 펼쳐질 예술은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2025년 우리는 기록적으로 무더운 여름을 견디고 비로소 가을을 맞았다. 기상 전문가들은 올해가 그나마 상대적으로 가장 ‘시원한’ 해일 거라 전망했고, 앞으로 매년 조금씩 더 심해질 더위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류는 언제부터 기후 위기 속에 살고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그 시대를 견디고 있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국가마다 각고의 노력을 기울임에도 왜 항상 우리는 매 순간 위기를 말할 수밖에 없는가.
이러한 위기 속에서 많은 이가 예술의 역할, 그 의미를 반문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후 운동가들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나 반 고흐의 작품 앞에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시위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 메시지를 전폭적으로 앞세운 미술관이 우리나라 강원도 원주에 문을 열었다. 이름도 ‘빙하미술관’. 신재생에너지 기업 한마음에너지의 이경남 회장과 심형금 관장 부부의 오랜 숙원 사업이 결실을 맺은 현대미술관이다. 이들은 2018년 예술과 지역사회를 연결하고, 문화 예술 진흥과 사회 환원의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그린희망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빙하미술관 개관은 그 활동의 꽃이자 또 다른 시작점인 셈이다.
미술관은 그 이름처럼 빙하의 조형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마치 물 위에 빙하가 떠 있는 듯한 부유형 구조와 스테인리스스틸, 유리로 이뤄진 외벽은 빛과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며 건축, 예술, 자연이 함께 호흡하는 장소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이렇듯 직관적인 외형은 건축물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여러 울림을 전달한다. 우선 ‘원주’라는 지역에서 원래는 볼 수 없는 ‘빙하’ 그 자체를 위치시킴으로써, 기후 위기에 대한 시각적 메시지를 꾸준히 환기한다. 다음으로 이 건축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탐구하는 공간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외벽은 주변의 자연과 하늘을 그대로 비추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를 반사하면서 또 다른 장면을 만들어낸다. 관람객은 단순히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경험’을 넘어 자연 속에서 건축을, 건축 안에서 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빙하미술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지각의 방향을 뒤집는 거울 같은 공간이 된다.
빙하미술관의 전시 공간은 지하 1층과 지상 1층으로 이뤄졌는데, 내부 공간에서는 공중에 설치한 V자형 보행 통로가 특별함을 더한다. 이곳에서 관람객은 360도 파노라마 뷰로 작품을 감상하며, 마치 빙하 속을 거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빙하미술관은 9월 27일 공식 개관전 〈Beyond Black: Light, Time, Memory〉를 선보이며 예술을 매개로 기후변화와 지속 가능한 미래에 관해 미술관이 어떻게 사유를 확장해나갈지 기대하게 하는 첫걸음을 내딛었다. 미디어 아티스트 알도 탐벨리니(Aldo Tambellini), 카민 르차이프라싯(Kamin Lertchaiprasert), 이이남이 참여한 전시의 주제는 탐벨리니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모든 색의 총합, ‘블랙’에서 출발한다. 여기에 깃든 철학과 전위적 실험을 조명하면서 동시에 참여 작가들의 기술과 미디어에 담긴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탐구하는 장으로 마련했다.
참여 작가를 한 명씩 살펴보자. 먼저 탐벨리니는 실험 영화와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전반을 아우른 작가로, 매체의 경계를 한정하지 않고 현대 기술과 인간의 정신을 한데 엮어 그야말로 실험적인 작업을 전개해왔다. 사실 이 전시는 그간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탐벨리니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특별한 자리이기도 하다. 드로잉부터 회화, 설치, 영상까지 다양한 작품을 통해 그의 급진적 실험 정신과 철학을 전시장 전반에 펼쳐 보인다. 특히 명상적 사운드와 빛이 어우러지는 ‘사운드룸’은 탐벨리니가 빛과 영상, 소리의 영역으로 예술을 확장해간 여정을 고요하게 마무리하는 공간으로 손꼽을 수 있다.
카민 르차이프라싯과 이이남의 작품은 실감형 전시장에서 교차로 상영된다. 불교 철학과 명상에서 주로 영감을 받는 르차이프라싯은 오랫동안 ‘삶과 죽음’이란 주제를 탐구해왔다. ‘After Death before Next Birth’는 언리얼 엔진과 공간 오디오 기술을 활용해 관람객이 생사의 경계를 몰입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한 작품이다. 한편 이이남은 ‘꿈속의 광주’를 통해 자신의 유년 기억과 5 · 18민주화운동을 초현실적으로 재구성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을 결합한 이 작품은 동서양의 공간을 오가며 사람들이 개인적이면서 보편적인 차원에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공감할 수 있게 한다. 이 밖에 인간 정신과 문명, 역사를 시적 디지털 풍경으로 펼쳐낸 6m 높이의 대형 설치 작품 ‘시가 된 폭포’도 감상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개관전에 참여한 작가들이 작업을 통해 몰두해온 지점이 조금 엇갈린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미디어를 기반으로 문명과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간 정신의 가치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이 질문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작업은 한자리에 모여 더 큰 서사를 완성한다.
빙하미술관 개관전을 기획한 아셀아트컴퍼니와 토포스스튜디오는 바로 이 지점에서 관람객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던 듯하다. 분명히 예술은 개인과 집단, 기술과 감정, 침묵과 목소리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결국 그것이,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빙하미술관이 그리고 예술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