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도시 베를린의 현 주소
낭만과 방황이 사그라든 자리에 뿌리내린 성찰과 연대. 베를린 ZK/U는 여전히 이 도시가 대안으로서 유효함을 증명한다.

“유능한 사람의 지속적인 유입, 런던·뉴욕과의 긴밀한 연결, 예측 불가능함으로 인한 시장과의 적절한 거리감 그리고 일종의 자기 성찰적 비판성.” 2015년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베를린에 스튜디오를 둔 이유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2026년의 베를린은 어떨까? 브렉시트 이후 런던과 베를린을 오가는 일은 EU 국가 사이의 왕래보다 더 많은 행정 절차를 요구했고, 팬데믹은 국가 간 이동을 한층 경직시켰다. 아트 바젤과 UBS가 공동 발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작년 미술 시장 매출의 76%는 미국, 영국, 중국이 차지했다. 연일 치솟는 임대료와 방문객 감소는 독일 레이빙 신(raving scene)을 넘어 문화 예술 전반의 문제가 됐으며, 지속적인 문화 예산 삭감은 주요 기관뿐 아니라 예술가들의 작업실이나 자생 로컬 공간 같은 대안적 예술 인프라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에도 베를린을 여전히 ‘대안’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어쩌면 10여 년 전 엘리아손이 말한 것처럼 ‘자기 성찰’의 힘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베를린 예술 · 도시학센터(Zentrum für Kunst und Urbanistik, ZK/U)는 이 도시가 그려온 대안적 궤도와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좌표다. 2012년 베를린 모아비트에 처음 문을 열어 작년 증축 공사를 마친 ZK/U는 독일 건축박물관(DAM)이 그해 독일에서 완공된 가장 중요한 건축 프로젝트를 선정해 시상하는 DAM 건축상 2026(DAM-Preis 2026)을 받았다.
옛 화물열차 역 부지를 도시 정원과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ZK/U는 지역 주민이 주도하는 도시 재생의 일환으로 탄생했다. 부지의 일부인 화물 창고를 예술 단체 쿤스트리퍼블릭(KUNSTrePUBLIK e.V)이 임대하면서 ZK/U는 국제 예술 레지던시이자 다양한 로컬 주민을 위한 프로그램이 이어지는 공공 복합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다. 여러 국적의 예술가와 연구자가 머물 수 있는 레지던시는 지금까지 800명 이상의 입주 작가와 400회 이상의 전시, 150회 이상의 국제 협업이라는 결실을 빚어내며 연간 2만 명 이상의 방문자가 다녀가는 공간이 됐다. 하지만 그 숫자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ZK/U가 동시대 글로벌 예술을 지역을 위한 실천으로 이어가는 방법이다. 격월로 열리는 ‘오픈하우스(Openhaus)’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레지던트들이 완성된 작품이 아닌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공유하는 자리로, 그들이 먹고 자고 작업하는 공간에서 진행해 주민들과 한층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지난 3월 진행한 오픈하우스는 레시피 공유, 기억을 매개로 한 글쓰기, 렉처 퍼포먼스, 건축 워크숍 등으로 구성됐다. 레지던트들은 각기 다른 주제와 방식의 작업을 완성된 결과물로 고정시키기보다 관람객이 직접 말하고 쓰고 움직이는 참여를 통해 작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렇듯 ZK/U에서 예술은 관람객을 만나 확장되고 관람객 역시 프로젝트의 일부가 되는데, 이러한 방향성은 ZK/U가 지속적으로 이어온 로컬 기반 프로그램과도 맞물린다. 로컬의 수공예 작품과 워크숍, 빈티지, 서비스 등을 만날 수 있는 커뮤니티 마켓 귀터마르크트(Gütermarkt), 영화와 식사를 함께 즐기는 푸드 앤 푸티지(Food & Footage)는 그야말로 식탁 위에서 동시대 예술을 경험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밖에도 중고 자전거 시장, 로컬 클럽 신과의 협업 등 다양한 커뮤니티 기반의 프로그램이 유연하게 어우러진다. 이곳에서 예술은 한 장소에 고정되지 않고 언제나 이동하는 것이고, 이런 흐름은 예술의 문턱을 낮출 뿐 아니라 동시대 예술이 지향하는 실천적 방향성과도 일치한다. 작년에 진행한 공간 확장 역시 이러한 상호 공존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ZK/U는 더욱 무거워진 공공이라는 무게, 국제 네트워킹의 수요, 한정된 예산, 기존 건축의 문화지정학적 흔적을 유지하는 등 복잡다단한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 페터 그룬트만과 ZK/U는 이에 대해 더 많은 사람에게 열려 있고, 더 적게 짓고, 더 오래 쓰는 방식으로 답했다. 버려진 기차역 벽돌의 그라피티를 지우지 않고 유리 파사드를 통해 볼 수 있게 보존하고, 오래돼 어긋난 연결부는 철거하는 대신 현장에서 하나씩 계산하고 조정해 맞춰나갔다. 내부 벽은 폐교의 칠판을 재사용해 비용을 절감했다. 그 결과 ZK/U에는 약 1000㎡ 규모의 기둥 없는 전시 · 행사 공간과 옥상이 더해졌지만, 새 건물이 기존 공간을 압도하는 형태가 아니라 오래된 구조와 새로운 활동이 계속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더 새롭게, 더 크게 짓기보다는 더 다양한 일이 가능하고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건축을 지향했다. 이런 방향성은 ZK/U 그리고 베를린이 그간 걸어온 궤적과도 닮았다. 지금의 베를린은 자유로운 낭만을 소비하는 분위기를 일컫는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느리고 따뜻하며 서로에 대한 책임과 연대를 나누는 것에 그 대안성이 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때때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기 성찰의 자세다. 이것이 개인과 공공의 실천으로 이어져 하나의 인프라가 되고, 그 구조가 녹슬지 않도록 오늘도 베를린의 아트 신은 조금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지속되는 한 베를린은 여전히 하나의 대안으로서 유효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