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에 헌정된 태국 첫 미술관
태국 방콕에 도시의 정체성을 새롭게 바꿀 만한 수준 높은 현대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이름하여 ‘딥 방콕(Dib Bangkok)’. 사업가이자 예술가 그리고 열정적인 컬렉터로서 평생 현대미술관 건립을 꿈꿔온 펫 오사타누그라의 꿈이 실현된 공간이다.


지금 아시아 미술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슈를 꼽으라면, 단연 ‘현대미술 중심지의 지형 변화’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방콕’이 있다. 특유의 불교문화와 호스피탈리티를 기반으로 세계적 관광도시로서 활약해온 방콕이 내재된 경제적 · 문화적 저력을 분출하며 ‘글로벌 아트 시티’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주로 민간과 메가 아트 컬렉터들이다. 컬렉터 마리사 찌아라와논(Marisa Chearavanont)이 개관한 카오 야이 아트 포레스트와 도심형 실험 공간인 방콕 쿤스트할레, 상업 갤러리를 재편한 100 톤손 파운데이션, 그리고 센트럴 그룹이 준비 중인 비영리 기관 디센트럴까지. 방콕은 이제 다양한 형태의 사설 기관이 미술 생태계를 이끄는 국면에 들어섰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화제를 모으는 존재가 30여 년간 준비 끝에 문을 연 딥 방콕이다.

태국어로 ‘날것(raw)’을 뜻하는 이름을 내건 딥 방콕은 2023년 세상을 떠난 펫 오사타누그라(Petch Osathanugrah)의 뜻을 이어 그의 아들 푸랏 창 오사타누그라(Purat Chang Osathanugrah)가 설립했다. 펫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온 태국 제약 기업 ‘오솟스파(Osotspa)’를 이어받은 기업가로, 뮤지션이자 작가, 배우로도 활동한 문화 아이콘이었다. 그가 평생 열정을 보인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현대미술이다. 사실상 현대미술이 싹틀 만한 문화적 뿌리가 부재한 자국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고, 그와 맥락이 닿는 서구권 현대미술 작품을 수집한 것이 컬렉팅의 출발점이었다. “태국에서 현대미술이 태동하던 시절, 사실 ‘동시대적 사고’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태국에 기반한 현대미술관이라면 국제 미술사라는 큰 장과 연결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딥 방콕은 펫이 30여 년간 모은 약 1000점의 소장품을 기반으로 한다. 작품 대부분이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로, 태국 현대미술의 핵심 작가로 꼽히는 몬티엔 분마(Montien Boonma)를 비롯해 제임스 터렐, 프랭크 스텔라, 나라 요시토모 등 글로벌 아티스트를 폭넓게 아우른다. 개관전 〈Invisible Presence〉는 그 방대한 컬렉션의 정수를 압축해 보여주는 전시다. 작가 40명의 작품 80여 점이 미술관의 건축적 디테일과 교차하며 서로 보이지 않는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전시는 천장에 매달린 은빛 비행선 형태의 이불 작가 작품 ‘Willing to be Vulnerable’을 포함하며, 한국 작가 이진준의 ‘Daejeon, Summer of 2023’도 소개한다. 발전소 냉각탑을 연상시키는 원추형 전시 공간 채플(The Chapel)에는 수보드 굽타의 ‘Incubate’가 자리해 작품과 공간이 전하는 감각을 동시에 일깨운다. 개관전의 가장 빛나는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것은 미술관 1층의 드넓은 중정을 가로지르는 알리시아 크바데의 조각 ‘Pars pro Toto’다. 마치 신이 구슬 놀이를 한 듯, 태양계의 여러 행성이 미술관 앞마당에 흩뿌려진 듯한 장관은 흥미롭게도 이곳이 ‘현대미술의 새로운 성소’임을 나타내는 표식처럼 느껴진다. 펫이 살아생전 꿈꾼, 제임스 터렐 작품만을 위한 특별 전시 공간 역시 2층 야외 조각 정원에 마련되어 있으니 놓쳐서는 안 된다. 아이코닉 미술관의 필요충분조건인 ‘스타 건축가’와 ‘컬렉터’의 만남은 이 미술관도 예외가 아니다. 건축을 맡은 WHY 아키텍처의 쿨라팟 얀트라사스트(Kulapat Yantrasast)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마이클 C. 록펠러 윙 프로젝트, 파리 루브르 관련 작업 등으로 주목받은 인물이다. 그가 1980년대 철강 회사 창고를 세련된 21세기적 실루엣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에서 주목한 것은 ‘날것’이라는 미술관의 정체성이었다. “오래된 창고 특유의 ‘거칠고도 우아한’ 결합을 사랑합니다. 날것의 구조 위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태국 · 중국풍 창틀이 더해지고, 그 너머 방콕 최대 항구가 배경으로 펼쳐지죠.” 그는 태국인으로서 균형 잡힌 감각으로 기존 건물의 태국 · 중국풍 창틀을 보존하는 한편, 불교 철학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향한 여정을 닮은 상승의 흐름을 따라 공간을 위로 쌓아 올리는 설계 방식을 택했다. 이른바 ‘채플’이라 불리는 원추형 갤러리 역시 대담한 건축적 시도로 태국의 ‘파고다’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술관 중심의 너른 안뜰은 교토 료안지 석정의 도식적 정밀함을 참고했다고 하며, 진입부의 긴 반사 수면은 그가 방콕의 수많은 운하를 오마주해 만든 미술관의 또 다른 창이라 할 만하다.

비로소 아버지의 꿈을 가시화하며 새로운 챕터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 미술관 설립자 푸랏 창 오사타누그라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의 컬렉션을 통해 현대미술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제 제 미션은 망설이는 사람들이 예술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고 싶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태국 현대미술계의 상징적 공간인 딥 방콕 외에, 수쿰윗 26 골목에 ‘딥 26’이라는 공간을 마련해 태국의 젊은 미술가를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돌이켜보면 수많은 문화 선진국의 기반에는 늘 눈이 밝은 예술적 선구자들의 전폭적 지원과 헌신이 있었다. 아시아의 잠룡으로서 미술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태국 역시, 지금 그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