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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컬렉팅의 새로운 지형, 동남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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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션의 흐름을 이끄는 빅 컬렉터들이 동남아시아를 주목하고 있다. 신흥 시장을 넘어 흥미롭고 독창적인 작품이 가득한 아트 신의 요충지로 부상하고 있는 이 지역의 매력에 대하여.

2018년 5월 필립스 홍콩 경매 출품 당시 낙찰가 526만 홍콩달러(약 9억7000만 원)를 기록한 후 2026년 3월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 재출품, 1697만 홍콩달러(약 31억4000만 원)에 낙찰되며 작가 신기록을 세웠다.

홍콩 이후 아시아 시장

오랫동안 아시아 미술 시장의 중심은 홍콩이었다. 지금도 그 구조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요 경매사와 글로벌 갤러리, 아트 페어의 핵심 거래는 여전히 홍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글로벌 컬렉터 역시 홍콩을 가장 중요한 허브로 인식한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시장 내부에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중심축의 이동은 아니지만, 아시아 미술 시장은 보다 다층화하며 풍성해지고 있다. 그 변화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동남아시아다. 동남아시아는 더 이상 단순한 신흥 시장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싱가포르, 방콕, 자카르타, 호찌민, 마닐라 같은 도시는 각각 다른 속도로 컬렉터층과 기관 인프라를 키우고, 시장은 더 이상 홍콩만 경유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국제 경매와 아트 페어가 아시아 미술 시장의 흐름을 사실상 결정했다면, 지금은 지역의 컬렉터 네트워크와 기관이 시장의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흐름은 2026년 상반기 홍콩 메인 경매에서도 확인되었다. 필립스옥션과 함께 3대 글로벌 경매사로 꼽히는 크리스티, 소더비를 포함한 홍콩 메인 경매를 기준으로 동남아시아 작가의 출품작 합계 낙찰가는 약 1700만 달러를 기록했고, 이는 전체 매출의 7.7%에 달한다. 출품작 수도 93점으로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많았고, 전체의 20%를 차지했다. 판매율은 90%를 넘었고, 평균 낙찰가는 추정가 상단의 1.83배 수준에서 형성됐다. 홍콩 전체 주요 경매의 규모가 2022년 이후 계속 축소되는 중에도, 동남아시아 작품의 비중은 오히려 늘고 있다. 다만 이 수치를 곧바로 시장 확장의 신호로 읽기는 어렵다. 시장 내부에서는 동시에 냉정한 평가도 나온다. 시즌마다 100만 달러 넘는 초고가 낙찰 작품은 여전히 1~2점 수준에 머무르고, 신규 참여자가 대거 유입되기보다 기존 소유자 사이에서 작품이 이동하는 구조라는 분석이 많다. 다시 말해 시장은 커지지만, 완전히 열려 있지는 않다. 동남아시아 시장은 여전히 폐쇄적이고, 그 폐쇄성 자체가 시장의 밀도와 가격을 유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즌의 성과는 몇몇 작가를 더 주목하게 한다. 2026년 봄 홍콩 메인 경매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보인 작가는 크리스틴 아이 추(Christine Ay Tjoe)다. 작품 ‘…To see the White Land’는 약 220만 달러에 낙찰되며 작가의 최고가를 다시 썼다. 특히 이 기록은 해당 작품이 2018년 5월 필립스 홍콩 경매를 통해 시장에 소개된 후 다시 세컨더리 마켓에 등장해 형성된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다. 이 결과는 단순한 작가 신기록이 아니다. 동남아시아 작가 시장 역시 이제는 1차 시장의 상승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세컨더리 마켓에서 재평가와 검증이 이루어지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뜻에 가깝다. 실제로 이번 시즌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100만 달러를 넘긴 작품은 많지 않고, 크리스틴 아이 추의 성과는 그 제한된 고가 파이프라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태국 출신 작가 나티 우타릿의 2014년 작 The Ambassador. 서구 고전 회화의 형식과 동시대 아시아의 정체성, 권력구조를 교차시키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베트남 근대미술의 대표 주자 레포의 1968년 작 Les Dahlias. 프랑스 식민지 시기 동서양 회화 언어를 결합한 서정적 정물화와 여성 인물화로 이름을 알렸다.

단순한 최고가 그 이상

함께 주목해야 할 작가로 태국의 나티 우타릿(Natee Utarit)이 있다. 그는 이번 시즌 작품 2점으로 약 34만7000달러의 낙찰가를 기록, 추정가의 3.58배 수준에서 거래됐다. 숫자만 보면 크리스틴 아이 추처럼 압도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그 의미는 남다르다. 나티 우타릿은 경매와 동시대 전시 시장, 그리고 지역 컬렉터의 지속적 반응이 함께 움직이는 작가다. 최근 홍콩 세일과 아트 바젤 홍콩 기간에 나타난 수요 역시 동남아시아 컬렉터들이 ‘단기 투기’보다 ‘장기적 컬렉팅’ 관점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홍콩 경매 이력과 아트 바젤 홍콩 출품 흐름을 보면, 그의 작품은 더 이상 특정 시즌의 반짝 수요가 아니라 안정적인 컬렉팅 대상에 가깝다.
동남아시아 시장의 특징은 이런 개별 기록보다 작가군 전체의 배열에서 더 잘 보인다. 2026년 상반기 시즌 상위권에는 크리스틴 아이 추를 비롯해 응우옌상(Nguyễn Sáng), 호앙띡쭈(Hoàng Tích Chù), 레포(Lê Phổ), 마이쭝트(Mai Trung Thứ), 부까오담(Vũ Cao Đàm), 아판디(Affandi), 로널드 벤투라(Ronald Ventura), 파시타 아바드(Pacita Abad), 알릭스 에메(Alix Aymé) 같은 이름이 함께 놓였다. 이 목록은 단순히 유명 작가를 모은 것이 아니라 지역별 미술사와 식민지 경험, 전후 추상과 초상, 풍경 그리고 현대적 재해석이 한 시장에서 동시에 거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남아시아 시장은 아직 하나의 미술사로 정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계보가 겹친 상태로 거래된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베트남 작가들이 다시 눈에 띈다. ‘Visions of Vietnam: The Melchior Dejouany Collection’ 경매를 기획한 크리스티는 21점으로 총 250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했고, 동남아시아 전체 매출의 15%, 출품작 수의 23%를 차지했다. 이 컬렉션은 단순히 한 번의 테마 세일이 아니라, 베트남 작가들의 가시성을 다시 끌어올린 사례였다. 레포와 마이쭝트, 부까오담 같은 이름은 이미 시장에서 익숙하지만, 특히 레포는 최근 필립스 홍콩 경매에서도 안정적인 결과를 이어가며 베트남 작가에 대한 꾸준한 국제 수요를 다시 보여주었다. 이번 시즌에는 이들이 단일 작가의 성과가 아니라 베트남 회화 계보 전체의 중심축으로 다시 자리 잡는 모습이 확인됐다. 상위 세 작가인 마이쭝트, 레포, 크리스틴 아이 추만으로도 동남아시아 매출의 상당 부분이 형성됐다는 것은 이 시장이 얼마나 소수의 핵심 작가군에 의해 지탱되는지 보여준다.

살만 투르의 2020년 작 Two Friends. 작가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 개인전을 통해 입지를 확고히 했으며, 프라이머리 및 세컨더리 마켓에서 컬렉터들의 엄청난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5월 필립스 뉴욕 이브닝 세일의 첫 번째 랏으로 출품했다.
인도네시아 아트 신을 대표하는 MACAN. © MACAN.

개인 컬렉터와 기관의 성장

그렇다고 동남아시아 시장이 단순히 몇몇 블루칩 작가에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지역은 강한 개인 컬렉터 문화와 사적 기관이 시장의 바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인도네시아도 그렇다. 오랜 시간 인도네시아 미술 시장은 공공기관보다 개인 컬렉터가 먼저 시장을 만들었다. 외이 홍 지엔(Oei Hong Djien)의 OHD 뮤지엄이 그 상징적 사례다. 그의 컬렉션은 인도네시아 현대미술과 컨템퍼러리 미술의 중요한 참조점으로 기능하고, 단순한 개인 소장을 넘어 지역 미술사 자체의 기록처럼 읽힌다. 인도네시아의 누산타라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in Nusantara, MACAN) 역시 중요하다. 하리안토 아디쿠수모(Haryanto Adikoesoemo)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설립한 이 미술관은 인도네시아 최초의 국제 수준 현대미술관으로 자리 잡았고, 지역 작가와 글로벌 작가를 같은 무대에 놓는 방식으로 자카르타를 동남아시아의 문화 거점으로 만들고 있다. 최근 방콕의 딥 방콕, 싱가포르의 S.E.A. 포커스 같은 플랫폼이 보여주듯 이 지역 시장은 더 이상 거래만의 문제가 아니다. 컬렉터, 기관, 전시, 아트 페어가 함께 작동하며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다.
이런 구조는 중국 시장과도 다르고, 인도 시장과 비교할 때 보다 분명해진다. 최근 뉴욕의 남아시아 미술 경매 시즌은 글로벌 3대 경매사를 합쳐 약 5100만 달러를 기록, 전년 대비 19% 성장했다. 낙찰률도 높고, 작품은 평균 추정가의 3.2배 수준에 거래됐다. 인도 온라인 경매 플랫폼 아스타구루(AstaGuru)가 런던 오피스를 열며 해외시장 확장에 나선 것도 같은 흐름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인도 시장은 동남아시아와는 성격이 다르다. 인도는 해외에 거주하는 인도 컬렉터와 글로벌 경매 참여가 강한 반면, 동남아시아는 지역 네트워크와 관계 중심 거래의 성격이 짙다. 같은 아시아 신흥 시장이라 해도 수요가 형성되는 방식은 다른 셈이다.

에텔 아드난의 2020년 작 Automne.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색면 회화로 최근 국제 미술 시장과 기관 전시에서 재조명되며 중동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필립스 홍콩 경매 프리뷰 전시.

지역 서사와 글로벌 무대

동남아시아 시장의 또 다른 특징은 안정성과 제한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최근 글로벌 경매시장 전반에서도 이러한 ‘지역성의 확장’은 점점 중요한 키워드로 작동하고 있다. 2026년 5월 열리는 필립스 뉴욕 메인 경매 역시 동남아시아 작가군을 직접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지만, 살만 투르(Salman Toor)와 에텔 아드난(Etel Adnan) 같은 작가의 출품은 최근 국제 컬렉터들이 단순한 서구 중심 미술사보다 다층적인 문화적 · 지정학적 서사를 가진 작가에게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파키스탄 출신인 살만 투르는 남아시아 디아스포라와 동시대 정체성을 회화적으로 풀어내며 국제 기관과 컬렉터 사이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키워왔고, 레바논 태생의 에텔 아드난 역시 중동과 유럽, 미국의 문화적 경험을 동시에 품은 작품으로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재조명을 받아왔다.
이는 동남아시아 시장과 직접 연결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근 글로벌 컬렉팅 구조가 단일 지역 중심 미술사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지역적 서사를 포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같은 흐름에 놓여 있다. 필립스를 포함한 글로벌 경매사들이 동시대 작가군의 지리적 스펙트럼을 보다 넓게 가져가고 있다는 점 역시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시장은 분명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완전히 열리지 않았고, 새로운 참여자가 대거 들어오는 구조도 아니다. 많은 작품이 기존 컬렉터 사이에서 다시 이동하고, 같은 작가가 여러 시즌 반복해서 상위권에 등장한다. 이런 점에서 동남아시아 시장은 폭발보다는 누적에 가깝다. 단기간의 급등보다는 오랜 시간 축적된 컬렉터층과 기관이 시장을 받치고 있다. 지금 이 시장은 분명 이전과는 다르다. 홍콩 하나로 설명되던 아시아 시장은 이제 싱가포르, 자카르타, 방콕, 뉴델리 그리고 다시 홍콩이 겹치는 구조가 됐다. 각 도시는 같은 시장을 공유하지 않는다. 대신 각기 다른 컬렉터층, 다른 작품 선호, 다른 기관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바로 그 다층성이 최근 아시아 미술 시장의 가장 중요한 변화다. 결국 동남아시아의 부상은 새로운 중심이 하나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시아 미술 시장은 하나의 중심으로 설명되던 시기를 지나 여러 개의 축으로 나뉘고 있다. 동남아시아는 그중 가장 분명하게 구조를 보여주는 지역이다. 시장은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았고, 여전히 폐쇄적이며, 초고가 작품에 대한 수요와 공급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제한된 구조 안에서 작가와 컬렉터, 기관이 만들어내는 밀도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지금 이 시장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 임연아(필립스옥션 한국지사 대표)
  • 에디터 김수진
  • 사진 필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