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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위에 피어난 현대 미술 도시 지벨리나

ARTNOW

예술이 도시를 구원할 수 있을까? 대지진의 상흔을 딛고 현대미술 수도로 일어선 지벨리나는 이미 미래 한복판에 있다.

naver.com알베르토 부리의 ‘Grande Cretto’ 전경. 폐허를 덮은 거대한 콘크리트 균열의 압도적인 규모를 보여준다.
밈모 팔라디노의 ‘Montagna di Sale’. 지벨리나의 초현실적 풍경을 상징하는 거대한 소금 산이다.

1968년 시칠리아 벨리체 계곡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멈춰 선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지벨리나가 올해 이탈리아 최초의 ‘현대미술 수도(Capitale Italiana dell’Arte Contemporanea)’로 선정됐다. 이탈리아 문화부가 2024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지자체의 지원서를 바탕으로 공모 형식으로 진행되며, 단순한 명예를 넘어 국가 지원과 다양한 공공 프로젝트가 집중되는 제도다. 올 한 해 지벨리나시는 도시 전역을 실험실 삼아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를 선보이는데, 이 릴레이는 ‘미래를 가져다주오(Portami il Futuro)!’라는 슬로건에 구심점을 두고 있다. 이 선언에는 단지 과거를 기념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예술 도시로서 정체성을 현대화하고, 나아가 인구 감소와 공동체 붕괴 등 현재 도시가 직면한 문제를 예술적 실천으로 재조명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피에트로 콘사그라 극장 내부, 미완의 건축 공간에 전시한 아드리안 파치의 설치 작품.


지진 이후 지벨리나는 단순 복원 대신 도시 자체를 예술의 실험장으로 재구성하는 길을 택했다. 당시 시장 루도비코 코라오는 건축가와 예술가들을 초청해 재건을 ‘예술적 설계’의 기회로 전환했다. 그 결과 지벨리나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야외 박물관으로 변했다. 광장과 거리에 조각과 설치 작품이 놓이고 건축은 기능을 넘어 서사를 갖기 시작했으며, 예술은 시민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장인들의 바느질과 자수 작업이 다시 이어지며 공동체는 회복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현대 예술가들은 이러한 흐름을 동시대의 언어로 확장했다. 그중 알베르토 부리의 ‘Grande Cretto’는 이 도시가 기억을 다루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리는 폐허 위에 거대한 콘크리트 판을 덮고, 옛 골목의 생김새를 따라 작품에 좁은 길을 냈다. 관람자는 그 틈을 걸으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로써 기억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 작동하는 층위로 전환된다. 콘크리트 표면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 미세한 바람 소리, 발걸음에 따라 달라지는 리듬은 공간을 살아 있는 구조로 만든다. 이탈리아 조각가 피에트로 콘사그라가 설계한 ‘피에트로 콘사그라 극장’ 역시 재건 이후 전개된 도시 실험의 흐름 속에 설계됐지만 1980년대에 공사가 중단된 채 오랫동안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 올해 이 공간에는 아드리안 파치와 마스베도의 설치 작품이 들어섰다. 난다 비고가 설계한 성당 ‘키에사 디 제수 에 마리아(Chiesa di Gesù e Maria)’도 긴 폐쇄의 시간을 뒤로한 채 전시 공간으로 다시 활용하기 시작, 프로젝트에 따라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

피에트로 콘사그라의 ‘Stella di Consagra’. 지벨리나 입구에 세운 상징적 조형물로, 도시의 관문 역할을 한다.
도시 야외 박물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치한 살바토레 쿠스케라의 ‘Scultura Sdraiata’.

오레스티아디 재단(Fondazione Orestiadi)은 이러한 지벨리나의 변화를 실질적으로 이끌어왔다. 올해 재단은 현대미술 수도 선정을 계기로 여러 프로젝트를 전개하는데, 크게 세 축으로 나뉜다. 지중해의 서사를 광장과 골목의 설치미술로 펼쳐내는 ‘바다로부터(Dal Mare)’, 지벨리나 예술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여성 예술가들의 기록을 현재와 조응시키는 ‘대화(Colloqui)’, 지역의 전통 직물을 현대적 오브제로 변모시켜 주민들이 직접 거리 행렬에 참여하는 ‘지금 여기의 것(Prisenti)’이 그것이다. 이 프로젝트들을 엮어내는 중심에는 재단의 지중해 직물 박물관(Museo delle Trame Mediterranee) 관장 엔초 피아메타가 있다. 그는 재단이 수십 년간 축적해온 민속공예 아카이브와 현대미술을 엮는 큐레이션을 책임지고 있으며, 과거의 유산과 동시대 예술이 같은 맥락 위에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오레스티아디 재단 안뜰에 자리한 밈모 팔라디노의 소금산 ‘Montagna di Sale’는 이러한 시도의 거점 역할을 한다. 1990년대부터 이어온 대표 설치작으로, 이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 개막식과 아티스트 토크, 주민 워크숍 등 과거와 미래를 잇는 예술적 실천이 쉼 없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남기고자 하는 것은 기념비가 아니라, 도시를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입니다.” 피아메타의 말처럼 이번 지벨리나 프로젝트의 핵심은 물리적 결과가 아니라 인식의 전환에 있다. 이 변화가 단지 일회성에 그치지 않도록 벨리체 계곡 전역을 연결하는 문화 · 관광 네트워크(DMO) 구축, 이를 뒷받침하는 지원 체계가 병행 중이다. 현재 지벨리나시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문화권의 창작자와 지역 주민의 협업을 도모하고 있으며, 지역 장인과 예술가가 함께하는 교육 프로그램과 공공 프로젝트 역시 도시 전역으로 확장해나가고 있다. 예술이 하나의 문화 프로그램을 넘어 도시 운영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1968년 1월 15일 지진으로 멈춰 선 도시는 2026년 같은 날 공표한 선언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균열 위를 딛는 발걸음, 다시 열리는 공간, 이어지는 손의 감각 속에서 과거는 반복이 아니라 변형된다. 반세기에 걸친 이 과정은 폐허를 예술로, 상실을 질문으로 바꿔왔다. 이제 지벨리나는 한 발 더 나아가 미래를 적극적으로 호명한다. 그 부름 자체가 이미 하나의 미래가 되고 있음을, 지금 이 도시는 가장 예술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증명하고 있다.

  • 박정윤(아트 칼럼니스트)
  • 사진 지벨리나 시청, 지벨리나 오레스티아디 재단
  • 에디터 윤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