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오페라의 다음 장면
오페라와 함께하는 삶의 궤적 위에서 국립오페라단의 새로운 장을 여는 박혜진 신임 단장 겸 예술감독.

박혜진 국립오페라단 단장 겸 예술감독에게 오페라는 오랜 세월 곁을 지켜온 삶의 언어다. 네 살에 피아노를 시작하고 초등학생 때 성악에 입문한 그는 성악가로 관객과 호흡하는 한편, 대학에서는 교육자로서 다음 세대를 길러왔다. 이후 서울시오페라단을 이끌며 작품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제작자의 시선까지 지니게 됐다. 노래가 버거워 다른 길을 떠올린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그를 제자리로 이끈 것은 오페라를 향한 마음이었다. 무대에 설 때마다 ‘나라면 어떤 작품을 만들 것인가’를 상상했고, 언젠가 국립오페라단을 이끌겠다는 꿈도 오랜 시간 간직해왔다. 성악가와 교육자, 제작자로 이어진 시간이 하나의 길 위에서 만난 지금, 그는 오랜 꿈의 자리에서 한국 오페라의 다음 장면을 그리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단장으로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 지 몇 달이 흘렀습니다. 요즘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은 뭔가요? 요즘 저는 2027년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웃음) 서울시오페라단을 거쳐 국립오페라단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만큼 이전과는 또 다른 국립오페라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열망이 큽니다. 2027년을 준비하고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죠. 물론 국립오페라단은 제가 오기 전부터 훌륭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지금은 제가 직접 품고 준비한 작품이 세상에 나올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에요.
‘국립’이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를 실제로 경험하며 이전과 달라진 시선이 있나요? 어깨가 무거워졌어요. 단순히 무대의 규모가 커진 것이 아니라 제가 짊어져야 할 책임의 깊이도 달라졌거든요. 하나의 기관을 운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오페라가 나아갈 기준과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자리니까요. 그 무게를 늘 의식하며,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단단한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취임 당시 국립오페라단의 방향성으로 ‘연결을 통한 확장’을 이야기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 연결은 오페라가 우리 삶과 동떨어진 예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관객과 무대, 전통과 현대, 한국과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되는 것이 국립오페라단의 중요한 역할이고요. 더 많은 사람이 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오페라의 문턱을 낮추는 동시에 애호가들에게는 국립오페라단에서만 만날 수 있는 깊이 있는 작품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대중성’과 ‘예술적 깊이’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고 싶나요?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새로운 관객을 공연장으로 이끄는 데 좀 더 무게를 두고 있어요. 관객과 만나지 못하는 무대는 그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 매력을 발견할 기회가 없던 분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싶어요. 다만 관객과 가까워진다는 이유로 작품이 지닌 본질과 깊이까지 가벼워져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더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오페라를 접하면서도 예술적 완성도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죠. 관객의 저변이 넓어질수록 한국 오페라의 다음 세대가 설 무대도 더욱 탄탄해질 것입니다.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실제 무대와 프로그램에 어떻게 구현하고자 하나요? 새로운 관객과 만나기 위해서는 오페라를 보다 편안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울시오페라단에서 선보인 야외 오페라 공연을 본 분들이 “오페라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며 다음에는 직접 티켓을 사서 극장을 찾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런 경험이 새로운 관객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습니다. 국립오페라단에서도 야외 공연을 비롯해 인문학 강연, 합창 수업, 성악 레슨 등을 결합한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통해 오페라와 일상의 거리를 좁히고 싶어요. 예술적 깊이는 작품의 본질을 지키는 데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해외 연출가를 초청하더라도 우리의 관객과 제작 환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예술감독과 작품의 방향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해요. 특히 국내에서 처음 제작하는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처럼 관객에게 낯선 작품일수록 과도한 변형보다는 고전의 중심을 충실히 보여주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적 감각을 입히되 원작의 색채는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제가 추구하는 방향이에요.

제작자로서 한 편의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살피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그 작품이 지금의 관객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가장 우선시해요. 오페라는 오랜 형식과 전통을 지닌 장르지만,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하거든요. 본질은 지키되 동시대적 상황과 감각을 담아 표현을 확장할 수 있는 작품인지가 중요합니다. 오페라가 오랜 시간 살아남은 힘도 결국 그 본질에 있다고 봅니다. 오래된 작품 속 사랑과 욕망, 관계의 갈등이 지금의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듯이 언어와 음악, 연기와 미술을 통해 인간과 시대를 입체적으로 표현하기에 형식은 오래됐어도 그 안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거죠.
단장님의 캐스팅에 기대를 거는 이도 많습니다. 이름이나 명성 너머 한 명의 예술가에게서 발견하고 싶은 자질이 있다면요? 실력은 무대에 서기 위한 기본 조건입니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책임감과 성실함, 그리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태도죠. 오페라는 혼자 완성하는 예술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함께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서울시오페라단에 있을 때도 국내 무대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성악가들을 발굴해 함께했는데, 이후 세계적 무대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습니다. 제가 사람을 잘 봤다기보다 그분들이 성실하게 시간을 쌓아온 결과가 아닐까 싶어요. 저 역시 오랜 시간 성악가로 활동했기에 노래를 들으면 그 사람의 태도와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거든요. 목소리에는 결국 그 사람이 살아온 방식이 담기니까요.
글로벌 무대에서 바라볼 때, 국립오페라단이 한국 오페라의 기반과 다음 세대를 위해 맡아야 할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한국 성악가들의 역량은 이미 세계 정상급이에요. 라 스칼라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비롯한 주요 극장에서 한국 성악가들이 주역으로 활약한 지 오래죠. 다만 이제는 연출과 제작 분야의 창의성을 함께 키워야 할 때입니다. 주어진 것을 정확히 수행하는 데서 나아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안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해요. 연출과 창작 분야의 다음 세대까지 탄탄하게 성장한다면 한국 오페라는 세계 어느 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국립오페라단은 젊은 예술가들이 경험을 쌓고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야 하고요.
무대 위에서 노래하던 시절과 무대 밖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지금, 오페라를 사랑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성악가로 무대에 설 때는 어떻게 하면 노래를 더 잘하고, 작품 안에서 더 빛날 수 있을지를 고민했어요. 지금은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작업 환경은 괜찮은지, 오케스트라와 출연진의 호흡은 어떤지, 관객이 불편함 없이 작품에 몰입하는지까지 살피게 됩니다. 한 사람의 시선을 넘어 무대를 이루는 모든 사람의 입장에서 작품을 바라보게 된 거죠. 다만 정신적, 체력적으로는 노래할 때가 더 편했던 것 같아요.(웃음)
국립오페라단의 하반기 공연 소식과 앞으로 계획도 들려주세요.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화전가>를 선보입니다. 현지 합창단이 한복을 입고 한국어로 노래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고, 한국 오페라의 색깔을 세계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뜻깊은 기회라 저 역시 무척 기대하고 있어요. 체코의 오페라 유로파 국제 콘퍼런스, 중국의 베이징 공연 예술 포럼에도 참여해 국제 교류의 폭을 넓히고, 한국의 뛰어난 오페라 인재들을 해외 무대에 소개하기 위해 도쿄 신국립극장과 라 스칼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비롯한 세계 유수 극장의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과의 협력 기반도 차근차근 마련하고 있습니다. 작품으로는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여는 <라인의 황금>과 프랑스어 버전의 <돈 카를로스>를 국내 초연으로 선보입니다. 관객에게 다소 낯설 수 있는 작품을 충분히 발전시켜 사랑받는 무대로 만드는 것 역시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국립오페라단이 앞으로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도록 다음 시간을 준비하는 데 몰두할 계획입니다.
훗날 ‘박혜진의 국립오페라단’이 하나의 장면으로 남는다면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요? 한국 오페라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끈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화려함보다는 품격을, 속도보다는 진정성을 선택한 무대를 만든 사람으로요. 오페라는 클래식인 만큼 지켜야 할 본질과 아름다움이 분명히 있어요. 전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과도하게 변형하기보다는 고전의 중심을 지키면서 현대적 감각과 색채를 섬세하게 더하고 싶습니다. 제가 말하는 품격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자신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오랜 시간 진정성을 다해 몰두했는지가 결국 사람과 작품의 품격으로 드러난다고 믿습니다. 그런 시간이 쌓인 무대, 오래 보아도 중심을 잃지 않는 무대를 남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