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을 넘어 창작 무대를 예술로 확장한 디자이너들
패션을 넘어 창작 무대를 예술로 확장한 디자이너들.
서울이 예술로 물드는 시기, 패션을 넘어 새로운 창작 영역으로 눈길을 돌리는 디자이너들의 인생 2막에 주목했다. 런웨이 밖에서 펼쳐진 그들의 행보는 한 시대를 풍미한 디자이너의 창작 세계가 또 다른 예술 장르와 만났을 때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DRIES VAN NOTEN
드리스 반 노튼에게 패션은 오래전부터 옷 그 이상의 것이었다. 컬러와 프린트, 예술과 공예, 역사적 이미지와 동시대 문화의 교차점을 탐구해온 그는 2024년 마지막 컬렉션을 끝으로 하우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서 물러난 뒤 오랫동안 수집해온 미적 세계를 보다 넓은 문화의 장으로 옮겼다. 그 결실이 지난 4월 베네치아에 문을 연 폰다치오네 드리스 반 노튼(Fondazione Dries Van Noten) 문화 재단이다. 팔라초 피사니 모레타를 기반으로 출범한 재단은 예술과 디자인, 패션, 건축, 음식 등 서로 다른 분야를 연결하며 장인정신과 창작 과정을 조명한다. 첫 전시 는 드리스 반 노튼과 헤르트 브륄루트가 함께 큐레이팅했으며, 주얼리와 패션, 디자인, 사진, 유리, 세라믹, 미술 등 200점이 넘는 작품을 베네치아의 역사적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컬렉션을 만들던 디자이너에서 다양한 창작의 가치를 발견하고 연결하는 역할로, 그의 관심은 패션 밖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SABATO DE SARNO
프라다와 돌체앤가바나, 발렌티노를 거쳐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한 사바토 데 사르노는 지난해 2월 구찌를 떠난 뒤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큐레이터로 새로운 행보를 시작했다. 밀라노 피시나 코치에서 지난 4월 20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는 그가 큐레이팅해 선보인 그룹 전시다. 전시가 향한 곳은 완성된 디자인의 화려한 표면이 아닌 그 뒤에 존재하는 사람과 과정이었다. 유리·세라믹·금속·석재·목재·텍스타일 등 여섯 가지 소재를 중심으로 12개 이탈리아 기업의 작업을 소개하며, 하나의 오브제가 탄생하기까지 필요한 손의 움직임과 시간, 장인의 기술과 경험을 조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사르노가 자신의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완성된 결과물 뒤에 가려진 제작 과정과 기술을 드러내고, 서로 다른 분야에서 축적된 감각을 하나의 전시 안에 연결했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소재와 형태를 탐구해온 그의 관심은 이제 다른 창작자의 작업과 그 안에 담긴 기술을 바라보는 일로 향한다. 지금까지 컬렉션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왔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의 창작이 만나는 장면을 만드는 큐레이터로 거듭난 것이다.

HELMUT LANG
2005년 패션계를 떠난 헬무트 랭은 조각과 설치를 중심으로 예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예술과의 접점을 넓혀온 그는 패션 이후 그 관심을 본격적인 조각 작업으로 옮겼다. 그의 작업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2010년 뉴욕 스튜디오에서 발생한 화재다. 불에 손상된 자신의 아카이브를 유산으로 보존하는 대신 새로운 작품의 재료로 선택한 것. 불에 그을린 의류와 아카이브의 잔해를 잘게 자르고 압축해 조각으로 재구성했으며, 작업 중 63점은 <63>이라는 전시를 통해 소개됐다. 이후에도 헬무트 랭은 기억과 흔적, 소멸과 재구성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2025년 미국 LA에 위치한 MAK 센터의 슈인들러 하우스에서 열린 에서는 조각 작업을 선보였고, 올해 5월까지 빈 MAK에서 열린 에서는 창작 과정을 조명했다. 익숙한 질서를 해체하고 그 흔적에서 새로운 형태와 의미를 발견하는 태도는 지금도 그의 조각을 관통한다.

RICK OWENS
릭 오웬스에게 가구는 패션과 별개의 영역이 아니다. 아내이자 크리에이티브 파트너 미셸 라미와 함께 필요한 가구를 직접 만들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2005년 본격적으로 가구 라인을 선보인 이후 두 사람은 대리석과 브론즈, 콘크리트, 합판, 가죽 등 날것의 질감이 살아 있는 소재를 활용해 패션과는 또 다른 형태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릭 오웬스의 가구가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기능과 조각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데 있다. 앉거나 눕기 위한 물건인 동시에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하나의 오브제가 되는 것. 근대건축가 르코르뷔지에와 마르셀 브로이어의 디자인부터 고대건축과 자연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퍼런스를 자신만의 비례와 물성으로 재구성한다. 이러한 특징은 2025년 뉴욕 살롱 94 디자인에서 열린 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옷에서 시작된 형태의 탐구는 이제 가구를 통해 공간의 깊이까지 파고든다.

TOM FORD
구찌와 생 로랑을 거치며 패션의 이미지를 새롭게 정의한 톰 포드는 2009년 <싱글 맨>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정교한 색채와 조명, 건축적 공간, 인물의 외형을 세밀하게 구성하는 방식에서 패션 디자이너로서 축적한 감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두 번째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에서는 더욱 어둡고 긴장감 있는 분위기를 펼쳐냈다. 아름다운 화면에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 욕망과 상실, 기억과 불안을 겹겹이 담아냈으며, 제73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올해는 세 번째 장편영화 <크라이 투 헤븐>으로 다시금 카메라를 잡았다. 18세기 이탈리아 오페라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지난 1월 로마에서 시작해 현재 촬영을 마친 상태다. 패션에서 출발한 톰 포드의 창작은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더욱 넓은 서사로 이어진다. 디자이너로서 구축해온 감각은 이제 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펼쳐진다.

MARTIN MARGIELA
패션의 정형화된 틀을 끊임없이 깨부순 마틴 마르지엘라는 2008년 패션계를 떠난 뒤 시각예술을 중심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9년 이후 회화와 조각, 콜라주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패션에서 보여준 해체와 재구성의 태도를 다른 형태로 옮겨왔다. 익숙한 사물의 기능과 의미를 뒤틀고, 일상적 물체를 낯선 모습으로 변환하는 그의 작업에는 완성된 형태보다 그것의 맥락을 다시금 바라보려는 관심이 자리한다. 올해는 일본에서 그의 예술 작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전시가 잇따라 열렸다. 도쿄 구단 하우스에서 개최한 에서는 역사적 주택 전체를 무대로 작품을 선보였으며, 교토 타카 이시이 갤러리에서는 2018년부터 2025년까지 제작한 14점의 작품을 소개했다. 패션 하우스를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마르지엘라의 작업에는 여전히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고 기존 의미를 다른 자리로 옮겨놓는 태도가 이어진다. 익숙한 것의 기능과 의미를 뒤집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돌려놓는 그의 방식은 패션을 떠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HEDI SLIMANE
에디 슬리먼은 어린 시절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열한 살 무렵 카메라와 암실을 접하고 직접 사진을 인화했으며, 사진기자와 저널리스트를 꿈꾸기도 했다. 이후 패션계에 들어온 뒤에도 그는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디올 옴므와 생 로랑, 셀린느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며 캠페인과 룩북을 직접 촬영하는 한편, 록 뮤지션과 거리 풍경을 꾸준히 기록했다. 패션 작업과 함께해온 그의 사진은 옷이 아닌 사람과 문화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간다. , , , 등의 사진집과 출판물은 그가 패션 사진을 넘어 독자적 작업을 이어왔음을 보여준다. 그의 사진은 전시를 통해서도 꾸준히 발표됐다. 베르사유에서 첫 전시를 연 뒤 베를린과 뉴욕, 파리, 암스테르담, LA, 상하이 등에서 전시를 진행했다. 슬리먼의 공식 웹사이트 속 다이어리에는 올해도 새로운 사진이 꾸준히 공개되고 있다. 사진가를 꿈꾸던 소년이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고, 이제 카메라를 통해 시대를 기록하고 있다. 패션과 사진을 오가며 자신만의 시선으로 동시대 풍경을 기록해온 그의 여정은 현재진행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