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델포이 여행기
아폴론의 신탁이 울리던 델포이에서 메테오라 수도원까지. 그리스의 오래된 성지는 믿음과 상상력이 지나온 시간을 품고 있다.

신탁의 도시
히아신스, 다프네와 월계수, 리라, 아홉 뮤즈를 떠올리게 하는 아폴론의 땅 델포이. 흙은 마르고 가지는 물기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거대한 군락을 이룬 올리브나무마다 열매가 빽빽하게 달려 있다. 그 뒤로 늠름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육중한 바위 협곡으로 카스탈리아 샘이 흐른다. 사제와 참배객 모두 이곳에서 몸을 씻었다. 이렇게 나는 세상의 중심 ‘옴팔로스(배꼽)’가 있는 델포이 신전에 왔다. 제우스가 독수리 두 마리를 세상의 양 끝에서 날려 보내 만난 이곳은 아폴론이 거대한 뱀 피톤을 물리친 자리이기도 하다. 제우스는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올림포스 대신 예언과 치유, 예술의 신 아폴론이 자리 잡은 파르나소스를 세상의 중심으로 삼았다. 배꼽이 바로 양분과 정신을 소통했던 자리 아닌가!
피톤은 성 게오르기우스나 벨중족의 지크프리트가 죽인 용과 같은 공상의 괴물이다. 오페라 <마술피리>도 왕자가 거대한 뱀과 싸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폴론을 기리는 신전은 피티아라는 무녀가 상주해 신탁을 하달했다. 아폴론의 승리를 기념하는 피티아 경기는 4년마다 개최되어 이레 동안 음악과 연극, 육상경기를 벌여 승자에게 월계관을 수여했다. 호메로스 시대인 기원전 8세기 이후 델포이의 명성은 전 세계에 퍼져 이방인까지 신탁을 구하러 왔다. 참배엔 값진 공물이 따랐고, 이를 보관할 국고(國庫)를 지어야 했다. 델포이 박물관의 옴팔로스 석(石)과 피티아의 솥, 은제 황소 따위가 아폴론 숭배를 증명한다. 말(馬)을 잃은 채 고삐를 놓지 않은 기수(騎手)는 엄숙한 사제복을 입고 당당한 풍모로 관람객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아폴론 찬가를 기록한 석판 악보는 19세기 말 해독되어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바츨라프 니진스키, 이사도라 덩컨 등에게 영감을 주었다.
델포이에 둔 국고의 규모와 보물이 곧 참배하는 나라의 국력을 상징했다. 참배객의 질문을 받은 피티아는 연기에 취해 최면 상태에서 신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으로 전했고, 이를 사제가 해석해 참배객에게 전했다. 그러나 답변이 모호해 풀이는 각자 몫이었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 침공의 성사 여부를 물었을 때, “할리스강을 건너면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답을 들었다. 승리를 확신하고 도발했으나 망한 것은 리디아였다. 영화 <300>에서 보듯이 뇌물로 피티아의 신탁이 변질되기도 했다. 그 페르시아 전쟁 때 절벽에서 굴러 내려온 바위가 적군을 덮쳐 그리스가 이겼다. 아폴론의 권능이 증명되었다고 믿은 그리스는 마라톤과 살라미스 해전의 잇따른 승리로 지중해 패권을 획득했다.
성지를 차지하려는 여러 차례 성전(聖戰) 동안에도 델포이는 온전히 보전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치세에 명성의 절정을 이룬 델포이는 로마 시대에 식민화되었다. 로마는 자신들의 신으로 델포이를 채웠고, 보물을 약탈했다. 기원후 바오로 사도가 주로 포교한 곳이 이교도 성지 코린트와 테살로니키였다. 사제로 재임한 플루타르코스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노력으로 성역은 보존되었지만, 황제도 보물을 빼돌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가져가 오늘날 이스탄불 술탄 아흐메트 광장에 서 있는 피톤의 뱀 기둥이 대표적이다.

그리스를 흡수한 기독교
38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못 박고, 이교 숭배와 제전을 금지했다. 델포이는 버려졌다. 그러나 아폴론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졌다. 오래전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 적힌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에서 스스로 무지함을 깨달았다. 진리에 도달하려는 의지는 플라톤에게 이어져 이데아론이 나왔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창조론을 그렸다. 그에 따르면 창조신 데미우르고스는 완전한 이데아를 모범 삼아 불완전한 질료에 질서를 부여해 우주를 지었다. 그가 우주를 창조한 이유는 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료는 그의 뜻대로 완전하지 않았다. 세상은 이데아의 불완전한 복제품이었다. 플라톤은 우주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시간을 영원히 움직이는 이미지로 그렸다. 서기로 바뀔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이데아를 곧 ‘태초의 말씀’으로 해석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에 플라톤의 접목을 완성했다. 이데아에 이르는 길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둘 사이의 차이는 방법론이었다. 플라톤은 이성을 통해, 기독교는 믿음과 구원을 통해 그곳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1453년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며 서유럽에 그리스 학문이 유입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의 창조’에서 태초의 말씀과 달리 조물주를 아담과 같은 모습이 아닌 제우스나 데미우르고스처럼 그렸다.
천국의 문턱
서유럽이 비잔틴 문명에 심취한 만큼 그리스는 힘겨웠다. 테살리아 평원을 내려다보는 수직의 바위 산맥 메테오라가 그 고난을 증언한다. 이슬람 지배기, 수도사들은 독수리 둥지 같은 바위산 꼭대기에 숨었다. 아폴론 신앙이 신탁의 벼랑 끝 하달로 유지되었다면, 고독과 금욕 속에서 하느님과 소통하려는 수도사들은 천국의 문턱 메테오라에 모였다. 16세기에 수도원이 창건되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억압에도 수도원은 정체성을 지켰다. 사람과 물자를 밧줄로 끌어올리던 절벽 위 기중기가 그곳의 지난한 삶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물론 오늘날은 잘 닦인 길을 통해 둥지에서 둥지로 옮겨 다닌다. 여전히 바지 입은 여성은 스카프를 둘러야 하고, 사진 촬영은 엄격히 금지된다. 사실 이런 터부는 오히려 이교도적으로 보인다. 관광지가 된 수도원은 창건의 뜻을 한참 벗어났다. 누구나 천국에 있다면 천국일 리 없으니까.

보물이 흩어지고, 책(생각)이 불타거나 묻혀도 없앨 수 없고, 흩어질수록 더욱 번성하는 것. 수도원이 성스러움을 잃더라도 남는 것. 바로 음악이다. 앞서 델포이 박물관 석판에서 본 첫 번째 아폴론 찬가는 중세 비잔틴 성가나 그레고리오 성가와 매우 가깝게 들린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고딕 성당과 메테오라의 높이만큼 차곡차곡 다성음악(polyphony)으로 자랐다. 비대해진 만큼 음악은 너무 무겁고 어려워 다시금 고대의 단순미를 그리워했다. 이에 르네상스 궁정은 아폴론 제전이나 로마의 개선 행렬을 본뜬 결혼 피로연을 열었다. 거기서 단선율(monody)의 오페라가 탄생했다. 같은 무렵 로마 사제 필리포 네리는 성서의 말씀을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연극과 음악을 동원했다. 네리의 오라토리오는 사순절 동안 금지된 오페라를 대신했다. 그럼에도 오페라의 위력은 대단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베네치아에 대중 극장이 문을 열었다. 19세기 말까지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둔 실내 극장이 유럽 변방과 신대륙으로 뻗어나갔다.

교회는 지동설과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근대과학의 성과 못지않게 극장을 끊임없이 경계했다. 말씀보다 음악이 우위가 되어서는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터진 둑은 막을 수 없었다. 대중은 전례 기도를 유명 오페라 아리아나 관현악 가락으로 노래했다. 20세기 초 교황청은 교회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와 르네상스 다성음악만 허용했다. 역설적으로 교회 밖에선 무력했고, 고립만 강화될 뿐이었다. 아폴론을 넘어 디오니소스까지 찬양한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한 시대였다. 마침 1896년 피에르 쿠베르탱은 신인류의 의례로 근대 올림픽을 창시했다. 개폐회식과 각종 경기는 고대 그리스 제전의 완벽한 부활을 뜻했다.
오늘날 극장은 주로 상연이 아닌 상영을 한다. 그 안에서도 “진짜냐, CG냐”, “사람이 한 거냐, AI가 한 거냐”가 논란이 된다. ‘에일리언’ 시리즈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AI가 자신을 만든 인간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가 창조했습니까?” AI는 피티아 신탁의 해석처럼 비스듬한 답변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우리 종(種) 너머의 이야기다. 극장과 무대 위 세계는 호모사피엔스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이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