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감각에 다가서는 몸짓
국립현대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서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 안무가 차진엽이 몸의 가치와 동시대 감각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

안무가이자 공연예술가 차진엽이 국립현대무용단 제6대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 취임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을 거쳐 영국 런던 컨템퍼러리 댄스 스쿨에서 수학한 그는 2012년 크리에이티브 아트 그룹 콜렉티브A를 창단한 뒤 몸을 중심에 둔 작업을 이어왔다. 대표작 〈원형하는 몸〉 시리즈, 국립무용단 〈몽유도원무〉 등을 통해 공간과 장르, 형식과 매체를 확장해온 그는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 안무감독,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개·폐막식 예술감독을 맡으며 활동의 폭을 넓혔다. 이제 국립 단체라는 새로운 장 앞에 선 차진엽을 만나 그가 바라보는 몸의 가치와 한국 현대무용의 지금, 그리고 앞으로 시간에 대해 들었다.
국립현대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된 소감이 궁금합니다. 감사한 마음이면서도 무게와 책임을 느낍니다. 개인의 성취나 기쁨을 떠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단체를 이끄는 자리의 깊이를 실감하면서도 고민하고 있는 요즘이에요. 이 자리를 겸허히 받아들이되, 제 경험과 에너지를 국립현대무용단의 앞날을 위해 책임 있게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은 마치 새로운 무대 앞에 선 느낌이에요. 혼자 추는 무대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시간과 몸이 함께 쌓여 있는 무대요.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동시에 더 깊이 들어가보고 싶습니다.
독립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구축한 뒤 국립단체를 이끄는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감각과 태도가 국립현대무용단이라는 장과 만났을 때 어떤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고 보나요? 그동안 저는 비교적 독립적인 위치에서 작업해온 터라 방식이나 결과물에서 자유로웠던 게 사실이에요. 특정 프레임 안에서 계획하기보다 제가 품고 있는 질문과 탐구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지를 중심에 두었거든요. 그런 생각과 경험이 국립현대무용단이 그동안 축적해온 성과와 만났을 때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대무용은 동시대 질문과 감각으로부터 계속 새로워지는 예술이기에 국립현대무용단 역시 지금의 시대를 어떻게 읽고, 몸에 대한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지금은 초창기인 만큼 구성원들과 제 나름의 철학, 세계관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이 안에서 우리가 새롭게 되짚어야 할 질문은 무엇인지, 또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중입니다. 그래서 이 출발은 제게 성취나 도착점이라기보다 제가 오랫동안 붙들어온 질문을 더 많은 몸과 사람, 시간 속에서 다시 만나야 하는 또 다른 시작에 가까워요.
오늘날 국립현대무용단이 현대무용을 통해 관객과 사회에 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현대무용은 결국 몸을 탐구하는 예술이에요. 몸을 통해 이 시대를 관찰하고, 그 탐구를 바탕으로 무용의 언어를 표현하지만, 단순히 유려한 동작이나 신체의 아름다움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거든요. 지금처럼 많은 것이 디지털화되고, 개인화와 고립이 심화되며 신체의 감각이 희미해지기 쉬운 시대에 현대무용은 몸의 가치를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몸은 우리가 타인과 만나고 세계를 감각하는 가장 직접적인 통로니까요.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결국 몸을 통해 세계와 만나잖아요. 인간으로서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철학적 질문도 그 안에서 함께 던질 수 있다고 봐요.
현재 국립현대무용단에 우선적으로 주어진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나요?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좋은 작품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공연 제작과 창작을 비롯해 교육, 지역 상생 프로그램, 해외 교류, 예술·기술 융합 등 국립현대무용단이 펼치고 있는 여러 사업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중심 가치를 정립하는 일이 뒤따라야겠고요. 사실 모든 활동은 몸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하고 확장되는데, 외부에서 볼 때는 개별 사업처럼 비쳐질 수 있거든요. 우리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그 의미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고 싶어요. 내부적으로는 무용단의 정체성과 방향을 단단히 다지고, 외부적으로는 대중이 현대무용을 낯선 장르로만 느끼기보다 자신의 몸과 감각, 삶의 경험으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금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현대무용은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몸과 그 안에 깃든 시대적 감각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장르라고 느껴요.”
국립현대무용단이 전 세계 관객과 만날 때, 한국 현대무용은 어떤 감각과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국립’이라는 이름에는 결국 한국성에 대한 탐구가 따라옵니다. 다만 제게 한국적인 것과 한국성은 조금 다르게 느껴져요. 전통을 현대화하거나 전통 예술을 지금의 언어로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몸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추적하는 것에 더 가깝죠. 〈원형하는 몸〉 시리즈를 준비하며 안동 금소마을을 수차례 오간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한평생 삼베를 다뤄온 70~80대 어르신들을 만났는데, 그분들의 삶과 노동의 시간이 몸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깊이 와닿더군요. 역사 속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시대에 공감되는 이야기였죠. 그런 시간을 살아낸 몸, 그 땅에서 살아온 몸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잊지 않고 간직해야 할 삶의 감각과 태도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제가 생각하는 한국성에 대한 탐구에 가까워요.
그동안 건축, 과학, 미디어 아트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창작자·연구자들과 협업하며 작업을 확장해왔습니다. 이러한 만남을 지속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 질문은 무엇인가요? 결국에는 몸,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지금껏 창작을 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붙들어왔거든요. 처음에는 제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어느 순간 제가 사라지고 더 넓은 세계와 만나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어요.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타인과 세상, 자연의 섭리를 더 이해하게 되고, 나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그래서 창작은 단지 아이디어나 영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태도로 함께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해요. 사무국 직원들, 협업하는 창작자와 연구자들, 무용수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다른 장르와의 융합이나 협업 자체가 목적인 적은 없었어요. 몸에 대한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과학, 건축, 종교, 기술 등 영역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거죠.
작업의 중심에는 늘 몸이 자리합니다. 안무가 차진엽에게 춤은 어떤 의미인가요? 춤은 몸을 통해 세계를 감각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세계를 감각하거나 그 관계를 인지하고 느끼고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몸짓이 나오고, 마음과 감정과 감각이 동요하면서 움직임과 춤으로 이어지는 거죠. 단순히 음악에 맞춰 감정을 표출하는 춤이 아니라 몸이라는 통로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모든 사람이 춤을 추면 좋겠습니다.(웃음) 꼭 무용으로서 잘 춰야 한다기보다 자기 몸에 몰입하고 솔직하게 움직여보는 경험을 했으면 해요.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몸치라고 말하지만, 춤은 기능적으로 동작을 잘 구사하는 것만이 아니잖아요. 자신의 몸에 집중하며 그 몸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감각을 지니고 있는지 경험하는 것 자체가 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용 안에도 여러 장르가 있지만, 그럼에도 현대무용만이 포착할 수 있는 감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요. 현대무용이 가장 예민하게 붙드는 것은 동시대성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발레나 한국무용이 동시대와 무관하다는 뜻은 전혀 아니지만, 각 장르가 오랜 시간 쌓아온 역사와 문법, 몸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릅니다. 한국 춤은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전통을 계승하는 힘이 있고, 발레는 인체의 선과 구조, 훈련을 통해 몸을 극도로 정교하게 확장해온 아름다움이 있죠. 현대무용은 신체 훈련 역시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몸과 그 안에 깃든 시대적 감각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장르라고 느껴요. 꼭 춤추는 몸만이 아니라 지금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몸, 보이지 않거나 소외된 영역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죠. 놓치고 있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하고 그것을 가시화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현대무용은 사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때로는 낯설거나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앞으로 국립현대무용단 안에서 가장 먼저 열어가고 싶은 흐름은 무엇인가요? 현대무용이라는 분명한 코어가 있지만, 몸을 탐구하는 본질적 질문을 다른 학문과 장르의 관점에서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어요. 지금 시대 몸의 가치를 무용 안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 철학, 건축 등 다른 분야의 시선과도 함께 바라보는 거죠. 특히 지금은 오히려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도 신체, 감각, 인지, 현존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들의 관점을 통해 우리가 생각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도 있고요. 그런 질문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좋은 창작으로 이어질 거예요. 결국 국립현대무용단 안에서 먼저 열어가고 싶은 흐름은 몸에 대한 개인의 질문을 더 넓은 사회적 감각과 공적 이야기로 확장하는 일입니다.
하반기에 구체적으로 준비 중인 일정이 있나요? 해외 안무가의 작품을 비롯해 재공연으로 선보이는 <트리플 빌> 등 이미 계획된 공연이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9월부터 내년 신작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려고 해요. 우선 그 과정을 쇼케이스 형태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또 12월에는 극장이 아닌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프로시니엄 무대 위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이 지닌 맥락이나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한 장소 특정적 퍼포먼스에 가까운 형식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