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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시간이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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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의 물성을 실과 직조, 설치로 확장해온 고소미 작가의 작업실 소미당에서의 기록.

하루 종일 큰 창을 통해 햇볕이 드는 소미당 1층 응접실.

서울 구로구 개봉동의 조용한 주택가. 모던한 나무 파사드와 낮고 간결한 대문의 단정한 양옥집이 눈에 띈다. 한지와 삼베, 소창 등 전통 소재를 바탕으로 설치미술과 공예를 넘나드는 작업을 펼쳐온 고소미 작가의 작업실 ‘소미당’이다. 꽃과 나무가 옹기종기 싹을 틔운 아담한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면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고요하고 아늑한 풍경이 펼쳐진다. 볕이 길게 드는 창, 세월의 흔적이 남은 벽돌 구조와 나무 계단, 전통 방식으로 시공한 한지 벽면과 화강석, 작가가 직접 베틀로 짜고 염색한 직물이 어우러진 공간이 하나의 설치 작품처럼 느껴진다.
고소미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한 뒤 한지의 물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다. 평면 회화에서 출발한 작업은 실과 직조, 염색과 설치를 넘나드는 섬유 기반 조형으로 발전했다. 종이면서 섬유이고, 평면이면서 입체로 변주되는 한지는 그의 작업 세계를 이루는 핵심 매개다. “특별히 전통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동양화를 공부하다 보니 한지가 가까이에 있는 게 늘 자연스러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고유한 물성에서 위안을 받은 것 같아요.” 익숙한 한국적 재료를 사용하지만 그 감각은 전통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한지는 그의 손을 거치며 동시대 조형 언어가 되고, 공간을 감싸는 공기와 빛의 밀도로 변한다.
소미당 곳곳에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보여주는 단서들이 놓여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소미사’라 불리는 실이다. 과거 한지 위에 남긴 자신의 그림을 해체하고, 자르고, 꼬아 다시 실 형태로 만든 작가만의 재료다. “예전엔 한지에 일기처럼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제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다 보니 그대로 두거나 버리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걸 해체해 아름다운 것을 만들면 감정도 풀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먹과 안료의 흔적, 감정과 시간이 스민 종이는 실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나 작가만의 작업 세계를 이룬다.

왼쪽 1층 한켠에는 한지의 물성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실험한 작품들이 놓여 있다.
오른쪽 고소미 작가.

소미사가 그렇듯, 소미당 역시 작가의 시간과 깊이 맞닿아 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단독주택을 작업실로 개조한 공간으로, 가족의 기억과 시간이 구석구석 깃들어 있다. “집의 흔적은 남기고 싶었어요. 그래도 1층은 손님이 오는 공간이니 조금 더 단정하게 마무리하고 싶었고요. 큰 면적을 차지하는 벽은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분위기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오래된 것과 새로 덧입힌 것이 충돌하지 않고 나란히 숨 쉬는 장면이 이 공간의 특별한 분위기를 만든다. 작가는 몇 해 전 공간 프로젝트를 통해 인연을 맺은 스테이 아키텍츠에 의뢰해 과거 건물에 현재의 작업을 더했다. 1970~1980년대 조적식 구조는 그대로 남기고, 벽면과 마감에 작가가 실제 사용하는 한지와 재료를 반영했다. 나무 계단과 복도, 벽돌이 만든 오래된 리듬 위로 한지의 부드러운 결이 얹히며 단정하면서도 아늑한 공간이 완성됐다. “제가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은 아니라서요.(웃음) 이곳에 오는 분들이 여기 놓인 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어요.” 실제로 소미당 1층은 전시장이자 응접실, 아카이브이자 거실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면, 2층은 실질적 작업 공간이다. 오랜 시간 몸으로 익힌 작업 동선, 기자재 크기, 테이블 높이, 염색과 건조, 직조와 보관 순서가 세심하게 반영되어 있다. “많은 분이 한지를 그냥 종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실이 되기도, 평면이 되기도, 죽이 되기도 하면서 여러 형태로 변할 수 있어요.” 작업실이자 재료 연구실이고, 작은 전시장이며, 기록의 장소이기도 한 이곳에는 안동에서 재배한 대마 섬유, 질감이 다른 한지 샘플, 작가가 만든 실과 베틀 위의 직물, 닥나무 껍질과 염색 재료들이 놓여 있다.

베틀로 소미사를 직조해 패브릭을 만든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각 지역의 원단과 한지 패브릭을 덧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고소미 작가의 조명이 어우러진 공간.
다양한 굵기의 소미사. 작가는 매일 한지를 꼬아 실을 만든다.
베틀로 소미사를 직조해 패브릭을 만든다.

최근 몇 년 사이 고소미 작가의 작업은 건축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2021년 제주의 스테이 프로젝트 ‘잔월’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오랫동안 연구해온 재료와 조형이 처음으로 ‘쓰임’을 갖게 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설치 작품 속에 빛이 들어오고, 공간 속 오브제가 실제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명과 커튼, 내장재 등으로 작업이 확장되었지만 그 과정은 단순한 응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작업 개념이 다른 형식으로 번역되는 시간에 가까웠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작가에게 적지 않은 질문을 남겼다. “많은 분이 알아봐주는 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현실과 타협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조병수 건축가와 함께 작업한 부안의 ‘파란곳간’은 이러한 고민에 대한 새로운 답이 되어준 프로젝트였다. 처음에는 커튼 의뢰로 시작됐지만, 공간을 마주한 순간 단순한 패브릭 작업으로 해결될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공간을 보자마자, 커튼보다는 제 설치 작품이 더 어울리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창을 가리는 기능은 유지하면서 하나의 작품으로 공간에 놓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죠.” 결국 설치 작업을 제안했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갈 수 있는 ‘문’ 형상을 공간에 풀어냈다.

위쪽 각 지역의 고유한 재료와 소미사, 패브릭, 오브제 등이 조화를 이루는 작업 공간.
아래쪽 세월의 흔적을 입은 단독주택 건물에 모던한 목재 파사드와 현관문을 더한 외관. © 홍기웅

이제 작가는 쓰임을 가진 작업과 순수 설치 작업 사이를 예전보다 훨씬 유연하게 바라본다. “돌이켜보면 제가 작업하는 순간은 늘 진심이었어요. 기물이든 디자인이든 순수 작업이든 개념은 같다고 생각하게 됐죠.” 그래서 최근 작가는 자신의 언어가 닿을 수 있는 형식을 조금 더 넓게 상상한다. 5월에는 런던 코로넷 시어터에서 조병수 건축가와 함께 전시와 염색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9월에는 파리 오텔 드 라 마린에서 건축적 소재로서 한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상하이, 맨체스터, 마쓰야마, 안동 등지에서도 각기 다른 작업 세계를 소개하는 전시가 이어질 예정이다. 동시에 건축가와 브랜드,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과의 협업도 계속된다. “성인이 되면 배울 데가 별로 없잖아요. 그런데 협업하다 보면 정말 많이 배우게 돼요. 다른 분야 사람들의 반응을 듣는 게 제게는 큰 공부예요. 계속 발전하고 싶거든요.”
이처럼 고요하면서도 단단하게 작업의 외연을 확장 중인 고소미 작가의 동력은 결국 소미당에서 비롯된다. “소미당은 시간이 흐르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에요. 아파트의 높은 층에서는 들리지 않던 하교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계절 냄새, 마당 식물의 변화가 시간의 감각을 일깨워주거든요. 창으로 스며드는 빛과 그로 인해 생기는 그림자를 보며 하루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고요. 저는 그 감각이 정말 좋아요.”
조용한 동네 깊숙이 자리한 집. 계절과 빛, 종이와 직물, 기억과 노동의 시간이 켜켜이 내려앉은 공간. 소미당은 고소미의 작품이 태어나는 장소이자 그의 작업 세계가 가장 밀도 높게 직조된 풍경이다.

  • 에디터 김수진
  • 사진 맹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