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팔레트
계절이 깊어질수록 선명해지는 가을의 색을 담은 작품.

윤형근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윤형근은 격동의 시대를 지나온 삶의 경험과 감정을 절제된 조형 언어로 응축했다. 1970년대부터 하늘을 뜻하는 청색과 땅을 상징하는 다색을 결합해 대표 연작 ‘천지문’을 선보였고, 1976년 작품 ‘Umber-Blue’는 이러한 회화 세계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던 시기에 완성됐다. 화면 양옆으로 짙게 솟은 색면은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처럼 서고, 그 사이의 여백은 어딘가를 향해 열린 문을 연상시킨다. 캔버스에 천천히 스며들어 번진 물감의 흔적은 단단한 형상에 깊이와 미세한 떨림을 더하며, 최소한의 색과 형태로 이루어진 화면은 묵직한 긴장을 품은 채 관람자의 시선을 보이는 것 너머 깊은 사유로 이끈다. 윤형근의 30여 년 화업을 새롭게 조명하는 전시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는 PKM갤러리에서 10월 3일까지 만날 수 있다.

이대원
과수원과 산, 연못 등 자연 풍경을 생동하는 점과 선으로 그리는 이대원에게는 ‘색채의 마법사’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전통 자수와 나전의 색채 구성, 동양화의 점과 선을 오랫동안 탐구해온 그는 익숙한 풍경을 찬란한 색의 리듬으로 바꿔놓았다. 대표작 ‘농원’ 연작에는 파주의 농원을 오랜 시간 바라보며 포착한 계절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87년 작품에서는 촘촘하던 점이 자유롭고 길게 뻗어나가며 나무와 들판, 하늘 사이를 힘차게 누빈다. 자수실처럼 뒤섞이지 않은 채 저마다 빛을 간직한 색은 화면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풍경에 깊이와 생기를 불어넣는다. 평범한 자연을 눈부신 색채의 장면으로 되살린 그의 회화 세계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시는 11월 8일까지.

조르조 모란디
“현실보다 추상적인 것은 없다”고 말한 조르조 모란디는 병과 화병, 상자처럼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사물을 평생 반복해 그렸다. 같은 대상을 바라보면서도 빛과 색의 농도, 사물의 거리와 배치를 세심하게 조율하며 매번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낸 것. 1956년 작품 ‘Still Life’에서도 익숙한 사물은 본래 쓰임을 벗어나 색과 형태, 공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조형적 존재로 다시금 태어났다. 회색과 베이지, 연한 갈색이 이루는 절제된 색조와 단순한 구성은 화면에 고요한 긴장을 불어넣고, 나란히 놓인 사물 사이의 미묘한 균형에 오래도록 시선을 머물게 한다. 제한된 소재 안에서 무수한 차이와 변화를 발견한 그의 회화는 이후 미니멀리즘을 비롯한 현대미술과 여러 세대의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모란디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 <조르조 모란디>는 11월 21일부터 2027년 3월 1일까지 더현대 서울 ALT.1에서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