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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펫의 파가니니, 세르게이 나가리아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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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음을 오래 이어가는 호흡처럼, 한 분야를 오래 탐구하는 데도 자신만의 리듬이 필요하다. 트럼펫과 플뤼겔호른으로 고유한 영역을 넓혀온 세르게이 나카리아코프가 들려준 음악과 태도, 그리고 한계를 넘어서는 방식에 관하여.

트럼펫은 오케스트라의 결정적 순간을 만드는 악기다. 그러나 트럼페터가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세르게이 나카리아코프(Sergei Nakariakov)는 그 익숙한 구도를 넘어선 연주자다. 10대부터 ‘트럼펫의 파가니니’로 불린 그는 압도적 기교를 바탕으로 바이올린과 첼로, 호른을 위해 쓰인 작품까지 트럼펫과 플뤼겔호른으로 옮기며 자신만의 레퍼토리를 구축해왔다. 주어진 작품을 능숙하게 연주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악기로 다룰 수 있는 음악의 범위를 꾸준히 넓혀온 것이다. 나카리아코프를 소개하는 것은 한 명의 비르투오소를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악기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지금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가 어떻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가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서울국제음악제 무대를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나 하나의 악기를 탐구해온 시간과 그 길을 이어온 태도, 여전히 음악에서 찾고 있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10월에 열린 서울국제음악제에서는 트럼펫과 플뤼겔호른을 오가며 쇼스타코비치, 브람스, 류재준의 서로 다른 성격의 작품을 연주했습니다. 이처럼 폭넓은 레퍼토리를 연주할 때 각각의 곡마다 접근 방식도 달라지나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음악은 대부분 추상적이지만, 모든 작품에는 저마다 들려줘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죠. 브람스를 연주하다 갑자기 비트만의 협주곡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완전히 다른 음악이지만,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특별히 어렵지는 않습니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다른 영화로 넘어가거나, 한 권의 책을 읽다가 다른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하죠. 전형적인 클래식 프로그램은 초기 음악에서 시작해 점차 현대적이거나 대중적인 작품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짜이지만,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죠.

여섯 살에 피아노를 시작한 뒤 아홉 살 무렵 트럼펫으로 악기를 바꿨습니다. 트럼펫이 평생의 악기가 된 계기가 있었나요?
여섯 살부터 아홉 살까지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누나가 피아니스트였기에 저도 자연스럽게 시작한 거죠. 하지만 누나가 훨씬 잘했어요.(웃음) 저 역시 피아노보다 다른 것에 더 끌린 것 같고요. 아홉 살 무렵 아버지가 트럼펫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는데, 연주해보니 정말 재미있었어요. 얼마 후 제가 트럼펫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죠. 어린아이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잘한다는 인정은 큰 동기부여가 됩니다.

아버지 미하일 나카리아코프는 당신의 스승이자 트럼펫을 위한 여러 작품을 편곡한 음악적 동반자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버지는 제 멘토였어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주셨죠. 진지하게 연습하고, 시간을 지키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 그리고 트럼페터에게 특히 중요한 ‘언제 쉬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 등을요. 트럼펫은 입술과 호흡 등 신체를 많이 사용하는 악기라 휴식이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버지가 늘 강조한 말이 있어요. “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 중간은 없다(To do or not to do. Not in between).” 하기로 했다면 제대로 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이 말은 제 삶의 태도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0대 초반부터 ‘트럼펫의 파가니니’로 불릴 만큼 뛰어난 기교로 주목받았습니다. 젊은 시절의 연주와 비교할 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특히 음악에 담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바뀌었죠. 이제 제 안에는 들려줄 이야기가 훨씬 많습니다. 살아온 시간과 경험이 쌓였으니까요.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거라고 생각해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협주곡이나 하이든의 첼로협주곡처럼 다른 악기를 위해 쓰인 작품도 꾸준히 연주해왔습니다. 새로운 작품을 트럼펫이나 플뤼겔호른으로 선보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사실 말씀하신 작품은 모두 아버지가 편곡했습니다. 다른 악기를 위한 곡을 연주할 때는 가능한 한 작곡가가 처음 생각한 아이디어에 가깝게 다가가려고 합니다. 다만 그것을 제 목소리로 표현하는 거죠. 악기는 결국 음악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또 작품과 악기의 성격이 잘 맞는지도 중요해요. 예를 들어 트럼펫은 바이올린처럼 높은 음을 낼 수 없고, 여러 음을 동시에 연주할 수도 없습니다. 화음이 필요할 땐 일종의 아르페지오처럼 음을 빠르게 연주해 비슷하게 들리는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관악기는 호흡이 중요한 만큼 순환 호흡으로 긴 프레이즈를 이어갈 수 있다고 해도 연주자의 신체적 조건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Photo by Jaroslav a , Courtesy of the Artist

“결국 중요한 것은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마음을 오래 지켜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럼펫은 피아노나 바이올린에 비하면 독주 레퍼토리가 제한적입니다. 이런 한계가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나요?
저 이전에도 훌륭한 트럼펫 솔리스트들이 큰 길을 열어왔습니다. 라인홀트 프리드리히, 모리스 앙드레 등의 연주자가 대표적이죠. 트럼펫에는 분명한 전통이 있고, 지금도 새로운 세대의 뛰어난 연주자가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젊은 트럼페터들도 수준이 높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 경우 아버지의 편곡 덕분에 고유하고 특별한 레퍼토리를 갖게 됐고, 덕분에 다른 연주자들이 자주 다루지 않는 작품을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비롯해 많은 솔로 트럼페터의 활동이 젊은 세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면 기쁠 것 같아요.

플뤼겔호른 역시 당신의 음악 세계에서 중요한 악기입니다. 트럼펫과 플뤼겔호른은 각각 어떤 악기인가요?
둘 다 결국 공기가 들어가고 나오는 악기라는 점에서 비슷합니다.(웃음) 성악에 비유하면 테너와 바리톤, 혹은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저는 가끔 플뤼겔호른을 ‘관악기의 첼로’라고 부릅니다. 프렌치호른이나 트롬본에 가까운 부드러운 음색을 지녔고, 음역도 낮은 편이거든요. 반면, 트럼펫은 보다 직접적이고 높은 소리를 내죠. 어떤 악기를 선택할지는 작품의 음역뿐 아니라 제가 그 음악을 머릿속에서 어떻게 상상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외르크 비트만의 ‘Ad Absurdum’처럼 당신의 기교와 가능성을 전제로 탄생한 작품도 있습니다. 신체적·기술적 한계를 넓히기 위해 특별히 훈련하는 방법이 있나요?
금관악기 연주자를 위한 연습 도구가 많지만, 저는 그냥 악기로 연습하는 편입니다. 에튀드나 별도의 연습곡보다는 연주할 작품 자체를 통해 준비하는 편이죠. 물론 작품에 따라 준비 기간은 크게 달라집니다. 특히 비트만의 협주곡은 다른 곡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해요. 몸 전체와 근육이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도록 충분히 대비해야 합니다.

비트만을 비롯해 파질 세이, 미하일 플레트뇨프 등 여러 작곡가가 당신과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트럼펫 레퍼토리를 만들어왔습니다. 이런 작품이 늘어나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파질 세이의 작품은 원래 제 친구이자 헝가리 트럼페터 가보르 볼도츠키를 위해 시작됐는데, 이후 두 대의 트럼펫을 위한 곡으로 발전하면서 제가 함께하게 됐어요. 위대한 작곡가들이 저를 위해 곡을 써준다는 것은 정말 큰 영광이죠. 저도 트럼펫 레퍼토리가 확장되는 과정에 참여한다는 의미니까요. 작곡가와의 협업 자체도 흥미롭고요.

벨기에 피아니스트 마리아 미에로비치와 함께 프리퀀자 페스티벌(Frequenza Festival) 예술감독도 맡고 있죠. 이곳에서는 어떤 음악들을 선보이고 있나요?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소피아 필하모닉과 함께하는 음악 축제로, 내년 5월 세 번째 행사를 엽니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것은 실내악과 금관 음악의 세계를 연결하는 자리예요. 여기에 재즈적 요소도 더하고요. 예술감독으로서 평소 해보고 싶던 음악을 자유롭게 시도하면서, 관객들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작품과 좋은 편곡을 알리려 하고 있어요. 클래식 음악에 익숙한 관객에게도 금관 음악은 비교적 새로운 영역일 수 있으니까요. 런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 트롬본 연주자, 재즈 피아니스트와 함께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고, 스위스 작곡가이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다니엘 슈나이더의 작품을 비롯한 현대음악도 꾸준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약 40년 동안 트럼펫과 플뤼겔호른을 연주했습니다. 여전히 이 악기에서 발견하고 싶은 새로운 소리가 있나요?
아직 트럼펫으로 연주되지 않은 음악이 많다고 생각해요. 과거 작품을 새롭게 편곡할 수도 있고, 앞으로 새로운 작품도 계속 쓰일 겁니다. 그런 음악이 많아질수록 저 역시 제 악기와 함께 더 다양한 가능성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더욱 성장하겠죠. 현대음악에서는 기존 악기에서 새로운 소리를 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는데요. 제게는 그 사운드가 음악 전체를 위해 필요한지, 그리고 연주자와 관객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핵심은 ‘음악’입니다.

평소에는 어떤 음악을 즐겨 듣는지 궁금해요.
클래식보다는 재즈를 좀 더 즐깁니다. 비율로 따지면 재즈 60%, 클래식 40% 정도죠. 재즈 아티스트 중에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특히 좋아해요. 그의 음악을 즐겨 듣다 조 자비눌, 웨인 쇼터, 허비 행콕 등도 알게 됐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바이올린 독주 부분을 들었습니다.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연주하는 류재준의 육중주에 등장하는 프레이즈와 연결되는 느낌이 있어 찾아보았는데, 무척 아름다워 계속 듣고 있어요.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떤 곡을 연주할 것 같은가요?
연주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 같습니다. 음악은 제 삶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굳이 곡을 하나 고른다면, 바흐입니다. 결코 질리지 않는 불멸의 음악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어떤 음악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들려주세요.
진지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음악가이고 싶습니다. 어릴 때부터 대중적인 작품이나 기교적인 곡을 많이 연주했고, 지금도 그런 요청을 자주 받습니다. 물론 즐겁고 감사한 일이죠. 다만 제게는 디저트와도 같습니다. 아무리 맛있어도 그것만 계속 먹을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중요한 점은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마음을 오래 지켜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