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수집하는 집
파리의 고전미와 베이루트의 감성, 그리고 예술이 교차하는 공간. 건축가 알린 아스마르 다만의 집은 기억과 문화, 그리고 아름다움이 축적된 풍경처럼 존재한다.

파리에는 아름다운 오스만 양식의 아파트가 많지만, 모두 19세기 건축의 우아함과 동시대 예술, 디자인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 알린 아스마르 다만(Aline Asmar d’Amman)은 자신의 취향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 그녀가 추구하는 ‘Culture in Architecture’라는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아파트를 레노베이션했다. 그녀는 최근 베네치아의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호텔을 완성하며 유럽 디자인계가 주목하는 건축가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수백 년의 역사를 이어온 팔라초를 되살리는 작업이나 매일 아침 눈뜨는 자신의 집을 꾸미는 일은 그녀에게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둘 다 시간과 기억을 보존하며, 새로운 삶을 위한 무대를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파리 집은 그 철학이 가장 진하게 응축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조각 석재로 이루어진 19세기 파사드, 묵직한 목재 출입문, 안뜰로 이어지는 긴 동선,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부드럽게 감도는 계단실까지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특별함이 느껴진다. 오늘날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파리의 전통 저택(hotel particulier)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우리 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건물 자체의 압도적 아름다움에 사로잡혔거든요. 모든 요소가 한 편의 무대처럼 눈앞에 펼쳐졌죠.” 알린은 집보다 먼저 건물 자체와 사랑에 빠졌다고 회상한다. 이후에는 건물 공용 공간의 복원 작업에도 직접 참여했다. 오래된 철제 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 인조 대리석 페인팅까지 하나하나 당시의 기술을 되살려 복원하며 프랑스 장인의 노하우와 함께 건물의 시간을 이어갔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만큼 오래된 것을 지켜내는 일 역시 건축가의 중요한 역할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인테리어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높은 천장과 양쪽에서 들어오는 풍부한 자연광이라는 건물 본연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가족의 삶에 맞게 공간 사이즈를 재구성했다. 현관은 보다 넓게 열렸고, 거실과 주방은 두 배 가까이 확장했다. 2개의 침실은 하나의 넉넉한 마스터 스위트로 합쳐졌다. 알린은 이 과정을 오래된 구조를 없애려는 레노베이션이 아니라 기존 건축이 지닌 잠재력을 오늘의 삶에 이어주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저는 언제나 장소가 지닌 영혼을 존중하면서 동시대 언어를 더하려고 해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우아함을 바탕으로 현대적 창조성을 조화롭게 담아내는 것이 제 작업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공간에는 극적인 변화보다 섬세한 개입이 많다. 특히 거울은 여기에서 중요한 건축적 장치로 사용된다. 연속적으로 거울을 배치해 공간이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착시를 만드는데, 서로를 반사하는 시선은 방의 깊이를 확장하고, 빛은 여러 번 굴절하며 실내에 극적인 리듬을 만든다. 이를 두고 그녀는 ‘조금은 관능적인 무한한 원근감’이라고 표현한다. 색채 또한 화려함보다 분위기에 집중하는데, 진줏빛 회색에서 짙은 회색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그레이 톤, 부드러운 화이트, 은은하게 반짝이는 메탈릭 소재가 공간 전체를 감싼다. 이는 파리의 하늘과 석조 건물, 도시가 만들어내는 빛을 그대로 실내로 옮겨온 결과다. “제게 파리는 언제나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에요. 집 안 곳곳에 파리라는 도시가 지닌 절제된 세련미와 시대를 초월한 우아함이 스며들어 있죠.”
레바논에서 태어나 파리에 정착했고, 스위스인 남편의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그녀의 삶은 언제나 여러 문화 사이를 오간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유럽과 중동, 세계 각지를 오가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그녀에게 집은 장소라기보다 감정에 가깝다. 그래서 매번 새로운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작은 오브제 하나, 오래된 책 한 권, 골동품 하나를 들고 돌아온다. 사물을 고를 때 중요한 것은 가격도 희소성도 아닌 ‘그 안에 시간이 깃들어 있는가’와 ‘자신의 삶과 감정이 물건과 연결되는가’다. 오래된 유럽 골동품 옆에는 동시대 조각 작품이 놓이고, 가족에게 물려받은 유산은 맞춤 제작한 가구와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가 충돌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풍경이 알린 아스마르 다만이 생각하는 품격 있는 삶의 모습이며, 시간이 쌓여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인테리어다. 거실의 아라베스카토 대리석 벽난로 옆에는 레바논 작가 압둘 라흐만 카타나니의 설치 작품이 자리하고, 침실에는 콜롬비아 작가 이반 아르고테의 조각이 공간에 생명력을 더한다. 여기에 남편 집안의 오래된 골동품과 자하 하디드의 초기 에디션 가구, 케이티 스타우트의 유쾌한 세라믹 의자가 한 공간에 자리한다. 이렇듯 시대도, 국적도, 재료도 다른 작품을 집 안에 배치한 이유는 그녀가 작품을 바라보는 기준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성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만나는 존재이며, 컬렉션은 미학적 구성이 아니라 삶의 축적이라고 설명한다. 어쩌면 우리가 작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작품이 집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곳은 서재다. 오래된 벽난로 위에는 스위스 가족의 다락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금빛 벽시계가 놓여 있는데 1925년 파리 장식미술 박람회를 위해 제작된 희귀한 작품으로, 수십 년간 잊혀 있다가 그녀의 집에서 다시 바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옆에는 광택이 도는 청동 의자와 현대미술 작품, 조각된 고서가 놓여 있다. 밤이 되면 숨겨진 바 캐비닛이 열려 조용하던 서재가 손님을 맞이하는 살롱으로 변신하고, 예술과 대화가 이어지며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지는 무대가 된다. 여성 예술가의 작품이 유난히 많은 점도 컬렉션의 특징이다. 알리차 크바데, 클레르 아델팡, 마리 쿠리를 비롯한 여러 여성 작가의 작업은 재료의 거친 물성과 섬세한 감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앞서 말한 케이티 스타우트의 세라믹 의자 역시 초현실주의와 조각가 니키 드 생팔의 자유로운 정신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 알린이 말하는 우아함과 강인함이 공존하는 여성성을 보여준다.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어린 시절 폐허와 전쟁의 흔적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무너진 돌담과 오래된 유적에서도 희망을 읽어내려 했고, 책 속에서 책장 너머의 다른 세계를 상상했다. 건축을 선택한 것도 결국 재건과 회복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공간에는 늘 상반된 요소가 존재한다. 거친 돌과 섬세한 패브릭, 오래된 골동품과 미래적 디자인, 문학적 감성과 건축적 질서, 장인의 손길과 현대적 기술처럼 서로 반대되는 것이 만나 오히려 더 깊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는 믿음이 그녀의 디자인을 관통한다. 그 철학은 최근 완성한 가장 큰 프로젝트, 베네치아의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팔라초 도나 조반넬리에서 더욱 극적으로 구현됐다. 15세기에 지은 베네치아의 역사적 궁전을 호텔로 탈바꿈하는 작업은 단순한 레노베이션이 아니었다. 처음 배를 타고 운하를 건너 궁전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물 위에 비친 건물의 모습에서 ‘시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수백 명의 장인을 참여시켜 수천 시간에 걸쳐 수백 년간 축적된 프레스코 벽화와 모자이크, 조각, 금박 장식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저는 손으로 만들어내는 작업만이 재료에 영혼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합니다. 수백 년의 역사를 품은 건축물에 개입한다는 건 막중한 책임을 수반하기에 문화재 당국, 많은 장인과 긴밀한 협업이 필요했고, 모든 결정에는 전통 기술과 장인정신에 대한 깊은 존중이 따랐죠. 예술성과 장인정신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파리 자택에서 보여준 태도처럼, 호텔 곳곳에는 현대적 디자인 언어가 스며들지만 결코 역사와 경쟁하지 않는다. 완성된 공간은 새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살아온 것처럼 느껴져야 한다는 믿음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개성과 영혼이 담긴 집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지 묻자, 그녀는 프랑스 작가 프레데리크 베그베데의 문장을 인용하며 이렇게 답했다. “’가장 아름다운 축제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열리는 축제다’. 저는 이 말이 진정한 집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공간에서 보내는 모든 순간이 기쁨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마음도 충만해지거든요. 매일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예술이 지닌 힘 속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세요.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나누고 전하길 바랍니다. 저는 누구에게나 직감을 믿으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떤 예술 작품이나 공예품을 만났을 때 마음이 움직이고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느껴진다면 그 감각을 믿으세요. 그것이야말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가장 좋은 출발점입니다.” 화려한 소재나 값비싼 오브제가 아닌 인간의 손끝이 남긴 흔적과 시간을 견뎌온 재료의 깊이, 그리고 그 안에서의 경험이야말로 진정한 하이엔드가 아닐까. 이는 파리의 집에도, 베네치아의 호텔에도, 그리고 앞으로 이어갈 모든 프로젝트에도 해당되는 중요한 철학이다.
- 글 양윤정(프리랜서)
- 에디터 손지수
- 사진 마티외 살뱅(Matthieu Salvaing)(공간), 클로에 르 레스트(Chloe Le Reste)(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