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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를 맞은 로에베 재단 공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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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마주한, 로에베와 공예가들이 손끝으로 이어온 시간의 서사.

왼쪽 다나카 노부유키, ‘Inner side – Outer Side 2021 N’, 래커 삼베, 950 × 980 × 2080mm, 2021년.
오른쪽 바바 트리 마스터 위버즈 × 알바로 카탈란 데 오콘, ‘Fra Fra Tapestry #2’, 천연 및 블랙 염색 코끼리 풀, 10 × 3300 × 3100mm, 2024년.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하우스의 본질을 고스란히 담아낸 프로젝트다. 1846년 스페인의 가죽 공방에서 출발한 로에베에 공예는 브랜드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 기반이다. 지난 5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로 공예를 바라보는 하우스의 철학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2026 로에베 재단 공예상 파이널리스트 발표 세리머니가 열린 곳은 동남아시아 근현대미술 분야 최대 규모 컬렉션을 보유한 싱가포르 국립 미술관이다. 올해는 133개 국가와 지역에서 출품된 5100여 점 중 전문가의 심사를 거쳐 최종 30인이 선정됐다. 19개 국가와 지역을 대표하는 작가들은 도자, 목공, 섬유, 금속, 주얼리, 옻칠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공예의 경계를 넓히는 시도를 선보였다. 9회를 맞은 공예상은 기술과 상상력, 과감한 실험을 통해 전통의 범주를 확장하는 작업을 한자리에 모으며 오늘날 공예의 흐름을 보여줬다. 이번 심사에는 잭 맥콜로와 라자로 에르난데스가 로에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격으로 처음 참여해 의미를 더했고, 한국 작가 6인이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한국 공예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올해 최종 우승은 한국 공예가 박종진에게 돌아갔다. 수상작 ‘스트라타 오브 일루전(Strata of Illusion, 착각의 층위)‘은 층층이 쌓아 올리는 기법을 적용해 휘어진 직선 형태 좌석 구조를 구현한 작품이다. 수작업으로 안료를 혼합한 도자 슬립을 종이에 바르고 이를 접고 겹쳐 압착한 뒤 직사각 덩어리로 만들어 건조와 1280℃ 산화 소성을 거치며 종이의 흔적을 세라믹 구조로 전환했다. 불규칙하게 함몰된 실루엣과 밀도 높은 표면은 물질이 변화하는 과정과 통제 그리고 붕괴 사이 긴장을 드러냈다. 작가 이름과 출신 국가 등의 정보 없이 오직 작품만으로 진행된 첫 비밀투표에서도 박종진의 작품은 심사위원 14명 중 12명의 지지를 얻었다. 스페셜 멘션에는 두 팀이 선정됐다. 바바 트리 마스터 위버즈와 알바로 카탈란 데 오콘의 협업 작품 ‘Fra Fra Tapestry #2’는 프라프라 공동체의 건축 문화와 의례적 전통을 바탕으로 한 대형 태피스트리다. 코끼리 풀을 활용한 텍스타일 작업은 공동체의 기억과 노동, 건축적 유산이 겹겹이 쌓인 결과물로 완성됐다. 또 다른 스페셜 멘션은 이탈리아 작가 그라치아노 비신틴의 ‘Collier’다. 서로 다른 크기와 형태의 큐브를 조합한 목걸이는 얇은 금 시트 구조에 니엘로 기법을 더했는데, 금속 위를 흐르는 검은 색조와 골드의 광택이 대비를 이루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표면을 구현했다. 싱가포르에서 마주한 장면들은 빠름이 미덕이 된 시대에도 공예는 여전히 사람의 손끝에서 묵묵히 피어나는 창작이자 예술이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예의 가치를 지지하는 로에베의 동시대적 행보의 다음 챕터가 기대되는 순간이다.

그라치아노 비신틴, ‘Collier’, 골드, 니엘로, 다양한 크기, 2025년.
이소명, ‘Chronicle of Matter’, 스팀 밴딩 오크나무, 황토, 로프 및 혼합 재료, 600 × 1100 × 550mm, 2025년.
이종인, ‘Baeheullim’, 호두나무, 975 × 400 × 615mm, 2025년.
2026 로에베 재단 공예상 파이널리스트 작품 전시 전경.

INTERVIEW with Jongjin Park, Artist

전통적 작업 방식에서 현재 작업으로 어떻게 확장되었나?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하며 전통적 도자 제작 방식을 배웠다. 지금도 정체성은 도예가라고 말한다. 다만 작업을 이어오면서 세라믹이라는 물질이 지닌 구조적 한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해왔다. 가마를 거친 뒤에는 더 이상 변형이 불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깨진 도자기를 왜 불완전한 상태로 규정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질문은 작업을 기존 세라믹 프로세스 내부가 아니라 그 바깥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방식을 탐색하게 된 계기가 있나? 영국 유학 시절, 익숙한 방식에서 잠시 벗어나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때 가장 흔하고 저렴하며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종이로 실험을 시작했다. 약 한 달간 종이 작업을 하며 사용한 종이를 다시 모아 쌓아두는 순간 묘한 기분을 경험했다. 그 안에 당시의 고민과 시간, 새로운 시도를 향한 긴장이 응축돼 있다고 느꼈다. 그 물질이 지닌 밀도 자체가 하나의 에너지처럼 다가왔고, 이를 작품으로 기록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종이를 태워 없애는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면? 키친타월 같은 종이에 백자 슬립을 바르고, 접고, 쌓아 형태를 만든 뒤 가마에서 고온 소성한다. 이 과정에서 종이는 완전히 소멸하고 슬립만 남는다. 중요한 것은 종이가 사라진 자리의 결과 주름이 그대로 구조로 전이된다는 점이다. 종이는 재료라기보다 형태를 만들어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에 가깝다. 종이가 연소되면서 생기는 다공질 구조는 이후에도 전동 공구로 다시 깎고 가공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일반적 도예가 가마 이후를 완성으로 본다면, 이 작업은 그 이후를 다시 시작점으로 설정한다.

성코코, ‘Pupsi’, 점토, 래커, 컬러 철사, 비즈, 스와로브스키 스톤, 다양한 크기, 2025년.
박종진, ‘Strata of Illusion’, 도자기, 종이, 스테인, 유약, 750 × 450 × 560mm, 2025년.
2026 로에베 재단 공예상 파이널리스트 작품 전시 전경.
조수현, ‘Reconstructed Perspective Vessel 3C1L’, 실리콘 브론즈, 구리, 각 250 × 250 × 150mm, 2025년.

이번 작품의 형태는 의도된 결과였나? 처음에는 직사각 형태의 대형 기물을 계획했다. 약 한 달 반 동안 거의 매일 슬립을 바르며 제작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소성 과정에서 작품이 가마 안에서 붕괴됐다. 1200℃가 넘는 환경에서 어느 정도 변형은 예상했지만, 실제 결과는 그보다 훨씬 극단적이었다. 처음에는 한 달 반의 시간이 무너졌다고 느꼈다. 그런데 다음 날 작품을 꺼냈을 때 상태가 예상과 달랐다. 구조는 무너졌지만, 예상치 못한 표면과 형태가 드러나 있었다. 이후 이를 다시 절삭하고 가공하는 과정을 거치며 현재의 구조로 이어졌다. 계획보다 우연이 더 강하게 개입하는 순간이 작업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작업 과정에서 느낀 흥미로운 지점은 무엇이었나? 우연은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과거에 도자는 철저히 통제되어야 하며, 작은 균열도 실패로 간주된다고 배웠다. 하지만 오히려 그 통제 밖 상황에 관심이 생겼다. 가마 이후의 결과를 완성으로 보지 않고, 다시 깎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단면과 패턴이 드러난다. 레이어를 제거할수록 의도하지 않은 색과 구조가 나타나는데, 이는 자연물의 단면을 마주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 지점이 작업에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이다.

관람객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끼길 바라나? 가장 먼저 “이게 뭐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길 바란다. 세라믹이라는 익숙한 재료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후 관람자가 작업의 물리적 과정과 시간을 따라가며, 각자 감각으로 확장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작업을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여전히 궁금하기 때문이다. 작업을 진행할수록 중요하다고 생각한 요소가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깨닫게 된다. 특히 규모가 큰 작업일수록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타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감각이 생긴다. 결국 완벽하게 통제된 결과보다 예상치 못한 형태가 드러나는 순간을 더 신뢰하게 된다. 지금도 가마에서 무엇이 나올지 가장 궁금한 사람은 결국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