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문화 기행
피렌체 르네상스에서 태동한 인간 중심의 세계관은 오페라와 영화, SNS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전과 기독교, 사랑과 창작이 얽힌 그 긴 계보를 따라 새로운 세계관의 가능성을 묻는다.
검색하고, 찍고, 올리고, 댓글로 소통하고. 피렌체 골목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풍경은 그리 다르지 않다. 누구나 창작의 주체가 된 시대. 대중문화에 파고든 ‘세계관’이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듣는다. 시리즈 영화나 드라마, 게임이 내세우는 세계관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을 공동체 일원으로 만든다. 아이돌 그룹은 노래하고 춤추는 데 그치지 않고 가사와 의상, 뮤직비디오 등에 스토리텔링을 부여해 차별화된 세계관을 제공한다. 이마누엘 칸트가 처음 세계관(Weltanschauung)이라는 말을 쓸 때는 그저 ‘보이는 세계’ 정도의 뜻이었지만, 오늘날 그 의미는 더욱 확장되었다. 현대를 요약하면 ‘자본주의적 개인주의 SNS 세계관’ 시대가 아닐는지! 내가 보기엔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가 그 진원이다.

고대의 귀환, 오페라의 탄생
지난달에 본, 괴테가 간과하고 지나친 피렌체 르네상스는 흔히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재발견한 시대라고 정의한다. 기독교는 천 년 동안 서양의 유일한 세계관이었다. 하지만 중세를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의 시대로만 본다면 편협하다. 교부(敎父)들은 플라톤의 철학 체계로 기독교 교리를 세웠다. 수도원은 라틴어를 가르칠 때 로마 고전을 사용했다. 아무리 조여도 빠져나갈 틈은 있었기에 교회도 이교적 풍습을 어느 정도는 눈감아주었다. 그렇기에 요한 하위징아 같은 학자는 르네상스를 ‘중세의 (원숙한) 가을’이라 불렀다.
흔히 떠올리는 르네상스의 아이콘을 보면 기독교와 고대 세계관의 융합이 더욱 또렷하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의 안내를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에게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를 그릴 때 하느님을 제우스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성경대로라면 시공을 초월한 조물주가 자기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는 아담과 같은 이미지여야 했을 터. 이런 ‘도발’의 허용에 자신감이 붙은 예술가들은 더욱 과감해졌다. 요아힘 파티니에나 피터르 브뤼헐 같은 화가는 성서나 신화의 사건을 풍경화 구석에 아주 작게 묘사했다. 이집트로 피신하는 지친 성가족이나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아 바다에 빠져 다리만 나온 이카로스처럼. 이른바 ‘세계 풍경화(Weltlandschaft)’를 통해 우리는 신적인 위치에서 위대한 이야기를 조망하기에 이른다.
고전을 향한 관심과 연구는 16세기 말 토스카나 공국 피렌체의 어느 창작 공동체에서 극대화되었다. 줄리오 카치니, 피에트로 스트로치, 빈첸초 갈릴레이(갈릴레오의 아버지), 오타비오 리누치니 등의 예술가들은 산타 크로체 광장에 있는 조반니 데 바르디 백작의 저택에 모였다. 후원자였던 백작이 교황의 신하가 되어 로마로 떠나자, 회원들은 자코포 코르시의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코르시는 직전에 토르나부오니 가문으로부터 저택을 사들였다. 1598년 이 저택에서 첫 번째 오페라로 꼽히는 <다프네>가 초연되었다. 집주인 코르시와 작곡가 야코포 페리가 리누치니의 대본에 곡을 붙인 공동 창작물이다. 이 뜻깊은 코르시 저택은 오늘날 다시 원주인과 거리의 이름을 본떠 토르나부오니 궁전(Palazzo Tornabuoni)이라 불린다. 최근 포시즌스 호텔 그룹이 이 건물을 매입해 주거 형태로 호화롭게 꾸몄다. 건물 1층엔 불가리, 보테가 베네타, 스테파노 리치, 까르띠에가 입점해 있다. 이곳부터 아르노 쪽으로 페라가모의 본점이 있는 자리까지 이른바 ‘피렌체 명품 거리’다. 파리나 밀라노, 심지어 청담동에 비해 소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창의적 자부심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세계관의 뼈대
오페라가 그저 몇 사람의 재주로 뚝딱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찍부터 메디치 가문은 사육제나 국가적 행사 때 고대 로마의 개선 행진을 본뜬 가장행렬을 기획했다. 가문의 후원을 받는 예술가들이 총동원된 화려한 이벤트였다. 1569년 코시모 1세 메디치가 토스카나 공국의 군주가 된 뒤로는 대공가의 결혼식이 그런 장을 마련했다. 1589년 3대 군주인 페르디난트가 로렌의 크리스티나 공주와 결혼할 때 열린 성대한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는 연극 <순례의 여인> 무대였다. 당시 연극은 관행적 본극이 아닌 그때그때 다른 막간극(Intermedio)이 더 큰 관심을 받았다. 5개로 나뉘는 막간극은 몇 달 동안 기획되었고, 엄청난 재정과 예술적 노력을 기울인 끝에 상연되어 하객의 감탄을 자아냈다. 당시 피로연을 위해 우피치 궁전 내 지은 화려한 ‘메디치 극장’은 뒷날 대공 가문이 더 큰 극장을 소유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오늘날엔 미술관의 일부가 되었다. 이때의 장관을 기억하는 예술가들이 막간극의 느슨한 형태가 아닌 줄거리를 갖춘 가무극을 만들기로 한 결과가 앞서 말한 <다프네>였다. 공동 창작자들은 모임 이름을 ‘카메라타’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들의 시도는 곧바로 피렌체 밖으로 전해졌다. 1607년 만토바 공국의 곤차가 가문에서 일하던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가 완전한 형태로 전하는 첫 오페라 <오르페오>를 썼다. 몬테베르디는 뒷날 베네치아로 건너가 죽기까지 ‘물의 도시’의 음악감독으로 일했다.
정작 피렌체는 오페라를 지배계급의 전유물 이상으로 바꾸지 못했고, 그 열매는 다른 곳에 열렸다. 몬테베르디를 품은 베네치아에 1637년 최초의 공공 오페라극장 산 카시아노가 문을 열었다. 프란체스코 카발리에서 안토니오 비발디에 이르기까지, 표를 팔아 관객을 모으는 극장 시스템이 베네치아 관광의 백미였다. 유럽의 유행을 주도하던 나폴리가 뒤를 이었다. 나폴리는 교육을 통한 극장 인재 배출로 베네치아에서 불가능하던 규모의 경제를 만들었다. 나폴리 전성기의 벨칸토가 만개할 무렵 새로 등장한 밀라노는 작곡가와 계약을 맺고 작품을 사들여 출판하기 시작했다. 결국 현대적 판권 시대 최후의 승자는 밀라노였다. 오페라의 여정은 고스란히 20세기 영화 산업에 적용되었다. 극장, 스튜디오, 스타 마케팅, 프랜차이즈로.
가상현실 세계관
이제 창의력의 거점은 도시도, 국가도 아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을 재현한 오페라를 오늘날엔 은막이나 액정 화면 따위에서 펼쳐지는 가상현실이 대체했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사라졌더라도, 어느 세계관이거나 결국 그것이 향하는 지점은 ‘사랑’이다. 사랑은 공감과 연민에서 비롯된다. 단테도 천국의 안내를 문지기 베드로가 아닌 자신의 사랑 베아트리체에게 맡겼다. 이집트로 피하는 성가족이나 무관심 속에 익사하는 이카로스처럼, 다프네를 향한 애틋함의 대가로 겨우 월계수를 얻은 예술의 신 아폴론이나 저승까지 아내를 찾으러 간 태초의 음악가 오르페오의 사랑이 폭넓은 공감과 연민을 일으켰다.
스크린은 더 노골적이다. 다른 별에서 모세처럼 바구니를 타고 온 메시아적 영웅이 십자가 자세로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와 정의의 사도가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는 유사 기독교 세계관이다. 한편 좌충우돌 말 많고 탈 많은 ‘어벤저스’로 불리는 초인들이 외계인의 우주적 위협에 맞서는 이야기는 그리스신화를 모방했다. 영웅의 임무와 작품의 흥행 모두 얼마나 사랑을 설득력 있게 다루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 그런 사랑을 찾아 느닷없이 성간(Interstellar)까지 날아가고, 그저 호색한인 줄 알았던 아이언맨도 제임스 본드도 결국은 애틋한 사랑꾼 딸 바보로 퇴장했다. 괴테가 옳았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 창조적 사랑이 우리를 끌어올린다.
다음 차례는 뭘까? 이 같은 형식과 내용의 반복이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관은 없을까? 수천만 사도를 거느린 어느 인플루언서가 오페라를 낳은 토르나부오니 레지던스에 머물며 그 풍수의 기운으로 기존 문법을 가볍게 뛰어넘을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 보일 순 없을까? 아니면 평생을 후미진 그늘에서 고전적 세계관 속을 헤매며 사랑을 갈망하는 나를, 혜성처럼 등장한 어느 이야기꾼이 구출해주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