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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언제부터 예술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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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시대를 읽는 하나의 문화적 언어이자 예술로 바라보는 미술관이 늘고 있다. 쿠튀르를 예술 작품의 경지로 끌어올린 디자이너들의 작업은 물론, 남자들의 옷을 차용하기 시작한 19세기 여성들의 옷장, 5000년을 아우르는 유물과 예술품, 의복을 나란히 배치해 미술사 전반을 새롭게 해석하는 흥미로운 시도까지. 복식이라는 렌즈를 통해 시대와 예술, 인간을 새롭게 읽어내는 전시 다섯 편을 모았다.

스페인 패션 디자이너 마리아노 포르투니의 델포스 가운과 기원전 5세기 후반 니케 조각상을 결합한 줄리 울프의 콜라주. Artwork by Julie Wolfe. Image Courtesy of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고전적인 몸’ 섹션 전시 전경. © Anna-Marie Kellen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Costume Art>

지난 5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한 차례 큰 변화가 있었다. 그간 주로 지하 전시실에서 연례 특별전을 열어온 코스튬 인스티튜트가 박물관의 중심부인 그레이트 홀 바로 옆에 약 1115m2 규모의 전용 전시 공간 ‘콘데나스트 갤러리즈(Condé Nast Galleries)’를 마련했다. 20년간 코스튬 인스티튜트를 위한 기금을 모으는 데 앞장선 애나 윈터를 비롯해 여러 패션 디자이너와 사업가, 콘데나스트사의 전폭적 후원 덕분에 가능했다. 이 광활한 전시 공간의 야심 찬 개관전이 바로 다. 무려 19개에 달하는 큐레이터 부서의 소장품 약 400점을 한데 모은 대규모 기획전으로, 코스튬 인스티튜트 수석 큐레이터 앤드루 볼턴에 따르면 “인간의 몸, 더 정확히 말하면 ‘옷을 입은 몸(dressed body)’”에 관한 전시다. 전시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5000년 역사를 품은 소장품을 통해 인류가 몸을 어떻게 표현해왔는지 폭넓게 조명한다. 또한 ‘고전적인 몸’, ‘노화하는 몸’, ‘벗은 몸’, ‘강력한 몸’, ‘종교적인 몸’ 등 예술로 표현된 신체를 여러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고, 그에 맞는 작품과 의상을 소환해 병치하는 식의 구성을 취한다. ‘벗은 몸’에서 아담과 이브를 그린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16세기 판화를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를 프린트한 월터 반 베이렌동크(Walter van Beirendonck)의 보디슈트와 함께 전시하고, ‘임신한 몸’에서 자궁 모양의 반짝이는 아플리케를 장식한 구찌의 시폰 드레스 아래에 고대 이집트 카닐리언 조각상을 놓는 식이다. 패션의 예술성을 조명하는 익숙한 기획을 넘어 방대한 미술사를 패션의 관점에서 읽어낸다는 점이 새롭다. 전시는 내년 1월 10일까지.

http://www.metmuseum.org/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의상을 입고 있는 런던 사교계의 유명인 레이디 마운트 템플 초상화. © Mark Fiennes Archive. All Rights Reserved 2026 Bridgeman Images.
엘사 스키아파렐리와 장 콕토가 함께 디자인한 이브닝코트. Photo by Emil Larsson. © 2025 ADAGP DACS Comité Cocteau, Paris.
2021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얼 로즈베리가 선보인 재킷이 놓인 전시장. ©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Schiaparelli: Fashion Becomes Art>

“나에게 의상 디자인은 직업이 아니라 예술이다.”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패션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말이다. 그는 실로 전 생애에 걸쳐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패션을 예술과 동등한 창작 영역으로 확장했다. 11월 8일까지 V&A 뮤지엄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의상 100벌과 미술 작품 50점을 포함한 400여 점의 작품을 4개 섹션으로 나누어 선보인다. ‘Designing the Modern Wardrobe’​는 1927년 트롱프뢰유 리본 스웨터를 시작으로 팬츠 슈트와 이브닝웨어, 독창적 액세서리 등을 통해 스키아파렐리의 디자인 세계를 살핀다. ‘Creative Constellations’​는 달리와 장 콕토, 알베르토 자코메티, 메레 오펜하임 등 당대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집중 조명, 예술 작품과 패션을 나란히 배치해 서로의 영향을 보여준다. 세 번째 섹션 ‘Beyond Paris’​는 1933년 런던 메이페어 살롱 개관 이후 국제적 디자이너로 성장한 과정을 소개한다. 조지 6세 대관식 의상,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스키아파렐리 웨딩드레스도 공개한다. 마지막 섹션 ‘A Golden Thread’​는 현재 메종을 이끄는 다니엘 로즈베리의 작품을 통해 스키아파렐리의 유산이 오늘날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아리아나 그란데와 두아 리파가 착용한 오트 쿠튀르 작품이나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스켈레톤 드레스 등 지금까지 이어지는 메종의 초현실주의 정신을 조명한다. 이 외에도 1937년 장 콕토와 공동 제작한 이브닝코트와 이를 위한 드로잉, 1938년 랍스터 드레스의 영향을 받아 살바도르 달리가 만든 ‘랍스터 전화기’, 만 레이의 뮤즈가 된 엘사의 사진까지. 패션 그 자체를 넘어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계와 패션의 관계, 그 폭발적 상호작용까지 아우른다.

www.vam.ac.uk

1910년대에 촬영한 레즈비언 여성들의 복식. © Lesbian Herstory Archives.
1905년경 모슈(Motsch)에서 뮈라 공주를 위해 만든 승마용 톱해트. CC0 Paris Musées, Palais Galliera.
1890년대에 라 벨 자르디니에르에서 선보인 세 가지 여성 승마복 실루엣. © Lesbian Herstory Archives.

<A Wardrobe of One’s Own>

오는 9월 26일부터 내년 2월 14일까지, 파리 팔레 갈리에라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복식사상 가장 흥미로운 흐름이 포착된 19세기 여성들의 옷장을 탐구한다. 승마 바지, 넥타이와 보타이, 크라바트 등 남성의 전유물이던 의상이 여성 예술가와 레즈비언, 지식인 계층에 널리 퍼진 ‘남성 복식 코드 차용 현상’을 다룬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바로 연상시키는 ‘자기만의 옷장’이라는 전시 제목에는 ‘19세기의 저항적 여성성’이라는 부제가 뒤따른다. 이 전시는 그동안 복식사에서 다루지 않은 ‘비어 있던 부분’과 흔한 패션 전시가 보여온 ‘규범적 여성성 중심 시각’에 대한 응답이다. 약 500점의 작품 중 아마조네스 복장, 테일러드슈트, 크라바트, 보타이, 실크 해트 등 남성복의 전유적 현상을 엿볼 수 있는 의상이 포함돼 있다. 19세기 프랑스 대표 화가로 평생 여성 파트너와 함께하며 기존의 성별 규범에 도전한 로사 보뇌르의 실제 의상 컬렉션이 하이라이트다. 여기에 미국 작가 내털리 클리퍼드 바니,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 등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인물들의 복식도 함께 소개한다. 회화와 패션 포스터, 당대 일상을 담은 150여 점의 시각 자료는 1900년 무렵 파리의 예술가와 레즈비언 공동체가 선호한 스타일, 슈트와 부츠를 착용한 직업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성별 이분법에 맞선 19세기 여성의 다양한 초상을 입체적으로 펼쳐낸다. 강력한 정체성의 표현이자 사회적 발언으로서 의상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www.palaisgalliera.paris.fr

<아제딘 알라이아가 1990 S/S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 일환으로 선보인 밴디지 드레스.> Courtesy of Fondation Azzedine Alaïa.


<Azzedine Alaïa et l’Afrique>

2018년 파리 마레 지구에 문을 연 아제딘 알라이아 파운데이션은 예술과 패션이 만나는 독보적 공간으로 손꼽힌다. “수년간 패션의 위대한 역사를 증언하는 드레스와 코트, 재킷을 꾸준히 수집해왔습니다. 그것들을 보존하는 일은 제게 하나의 사명과도 같죠.” 알라이아가 생전에 남긴 말처럼 이곳에는 3만5000점에 이르는 그의 컬렉션뿐 아니라 그가 평생 수집한 패션사의 명작이 함께 보관돼 있다. 내년 1월 4일까지 열리는 는 아제딘 알라이아의 고향 튀니지를 비롯해 아프리카가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핀다. 1988년, 1989년, 1990년 봄·여름 컬렉션을 중심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알라이아의 영감을 조명한다. 이 시기 그는 아프리카의 자연에서 비롯한 다양한 흙빛 계열 색채를 새롭게 해석했으며, 조개껍데기와 엮은 라피아를 활용해 아프리카에 대한 기억을 서명처럼 새긴 드레스를 탄생시켰다. 특히 레이스, 마크라메, 레이저 펀칭 면 소재 등 그가 고향 튀니지에서 접한 전통 격자창 무샤라비에(moucharabieh)에서 영향을 받아 디자인한 쿠튀르 드레스는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이 밖에도 이집트의 미라와 장례 의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밴디지 드레스, 골드 비즈 장식 마이크로 뷔스티에 드레스 등 독보적 존재감을 발하는 60여 점의 작품이 펼쳐진다. 일회성으로 소모되는 장식 레퍼런스가 아니라 평생에 걸쳐 알라이아의 미학을 구축한 정신적·감각적 토대로서 아프리카를 만날 수 있다.

fondationazzedinealaia.org

전시장 입구. Photo by Stany Dederen. © MoMu Antwerp.
월터 반 베이렌동크 2001~2002 F/W 컬렉션 ‘Revolution’의 비주얼. Photo by Elisabeth Broekaert.
런웨이를 하나의 설치 작품처럼 재현한 디르크 반 세인의 섹션. Photo by Stany Dederen. © MoMu Antwerp.

<The Antwerp Six>

앤트워프 패션 박물관의 는 이름 그대로 1980년대 벨기에가 배출한 젊은 디자이너 집단 ‘앤트워프 식스’의 유산을 오늘의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전시다. 디르크 비켐베르흐스, 앤 드뮐미스터, 월터 반 베이렌동크, 드리스 반 노튼, 디르크 반 세인, 마리나 이까지. 비슷한 시기 앤트워프 왕립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들은 지난 40여 년간 저마다 다른 창작 언어를 구축하며 현대 패션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들에게 각각 하나의 독립된 전시실을 할애해 여섯 디자이너를 하나의 통합된 사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관과 창작관을 지닌 개별적 주체로 바라본다. 각 디자이너의 개성을 공간 전체로 확장한 연출이 백미다. 월터 반 베이렌동크의 전시실에는 퀴어 문화와 환경문제를 유쾌하면서도 도발적으로 풀어낸 형광빛 컬렉션이 빼곡히 들어서고, 디르크 반 세인의 공간에서는 그의 1998~1999 F/W 런웨이를 설치 작품처럼 재현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마네킹과 이를 둘러싼 또 다른 마네킹 관람객으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초현실적 무대를 완성해 특유의 위트를 극대화했다. 반면 오스만 장식미술, 영국식 정원 문화 등 서로 다른 문화적 레퍼런스가 어우러진 드리스 반 노튼의 공간은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획득한 미학을 보여준다. 올 블랙의 시적인 실루엣으로 독보적 패션 세계를 구축한 앤 드뮐미스터, 스포츠웨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디르크 비켐베르흐스도 각자의 언어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지난해에 세상을 떠난 마리나 이의 섹션도 눈길을 끈다. 직물 조각과 병뚜껑, 철사, 깃털 등 버려진 재료를 창의적으로 재조합하며 지속 가능한 패션 담론을 앞서 제시한 그의 실험 정신을 심도 있게 기린다. 전시는 내년 1월 17일까지.

www.mom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