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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소스, 미궁에서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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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를 떠나 도착한 크레타. 크노소스 궁전과 미노스문명, 미노타우로스 신화가 겹겹이 쌓인 이곳에서 과거 이야기는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금 읽힌다.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를 그린 2세기 로마 모자이크, 빈 미술사 박물관.
안토니오 카노바, ‘켄타우로스를 제압하는 테세우스’, 빈 미술사 박물관.

아테네를 떠난 비행기가 약 1시간 뒤 지중해 복판에 자리한 크레타섬의 이라클리오 니코스 카잔차키스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공항 이름은 이 섬이 낳은 세계적 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1946)는 영원한 자유인의 표상으로 사랑받아왔다. 지난 10여 년간 극심한 경제난을 겪은 그리스는 얼마 전까지 구제금융과 뼈를 깎는 개혁을 통해 반전을 일궜다. 유로존의 ‘우등생’이 된 지금은 한때 냉소를 보냈던 독일과 프랑스의 부진을 비웃는다. 중심가 상점마다 관광객이 넘치지만, 상인들의 얼굴에는 고된 지난날과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그림자가 겹쳐 보인다.
이라클리오 고고학 박물관은 그 한가운데 자리한다. 기원전 1900년 무렵 이곳에 세워진 크노소스 궁전이 200년 뒤 지진으로 무너졌고, 크레타인은 그 자리에 더 크고 화려한 궁전을 지었다. 기원전 1700년부터 1450년 무렵까지 미노스문명은 절정을 누렸다. 그 뒤로 북쪽의 미케네가 크레타를 장악하고, 이후 아테네의 전성기로 이어진다. 내가 아는 첫 그리스인 호메로스는 불과 기원전 8세기 인물이다. 잊힌 크노소스 궁전은 1900년, 영국인 고고학자의 발굴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35년에 걸친 아서 에번스의 노력으로 크레타의 꿈같은 신화는 현실이 됐다. 이는 카잔차키스의 성년기와도 맞물린다. 하지만 에번스는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폐허와 파편에 불과하던 궁전과 유물에 콘크리트와 색을 덧입혔다. 그런 탓에 오늘날 크노소스 궁전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했다. 돌무더기가 나뒹구는 벌판과 콘크리트로나마 윤곽을 되찾은 크노소스 궁전 중 어느 쪽이 의미 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유물 이야기에 앞서, 내가 읽은 카잔차키스의 소설 <크노소스 궁전>을 요약해본다. 많은 이가 알고 있는 영웅 테세우스의 이야기, 즉 공주 아리아드네 덕에 실타래를 풀고 미로에 들어가 괴물을 죽이고 나오는 모험담이 뼈대다.

티치아노,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런던 내셔널 갤러리.

크노소스 궁전 이야기

청동기를 쓰는 아테나이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칠 제물로 철기 국가 크레타에 매년 일곱 명의 청년과 일곱 명의 처녀를 보냈다. 크레타의 미노스 왕은 기술자 다이달로스에게 미로를 만들어 괴물을 가두라고 명했다. 자유를 갈망하는 공주 아리아드네는 크레타에 온 젊은이가 아테나이 왕자 테세우스임을 알아보고 정표로 반지를 건넨다. 대장장이 아리스티데스의 딸 크리노는 아리아드네의 시녀이고, 아들 하리스는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카로스와 둘도 없는 친구다. 철 제련 기술이 뛰어난 아리스티데스가 테세우스와 아테나이로 탈출하자 미노스 왕은 두 아이를 잡아 문책하고, 다음 제물에 왕자 테세우스를 포함하라는 협박 편지를 아테나이에 보낸다. 아이게우스 왕은 아들 테세우스에게 신전 거석 아래 묻힌 보검 이야기를 해주고, 검은 돛을 달고 출항하는 그에게 성공하면 흰 돛을 달고 오라 이른다. 아리아드네는 뜨개질하는 크리노 옆에서 놀던 고양이가 실에 엉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에서 미로를 빠져나올 방법을 떠올린다. 실타래를 풀며 들어갔다가 되감으며 나오면 되겠구나!
제전의 아침, 테세우스는 실타래를 풀며 미로에 들어간다. 역한 냄새를 풍기는 미노타우로스에게 연민을 느낀 것도 잠시, 격렬한 싸움 끝에 괴물을 퇴치하고 실을 따라 밖으로 나온다. 군중의 환호에 못 이긴 왕은 그를 추방하고, 아리아드네도 정인을 따라 고국과 부왕을 등진다. 낙소스에 정박했을 때, 해변을 산책하던 아리아드네 앞에 표범을 거느린 남자가 나타나 포도 덩굴이 얽힌 배에 오를 것을 청한다. 크리노와 하리스의 만류에도 아리아드네를 태운 배는 떠나고, 테세우스는 아마도 그 남자가 디오니소스였을 것이라며 망연자실한다.
아들을 기다리던 아이게우스 왕은 약속을 잊은 테세우스의 검은 돛을 보고 절벽에서 떨어져 숨을 거둔다. 테세우스가 크레타를 치러 가는 사이, 크리노와 하리스는 창공에 커다란 날개를 단 새를 본다. 다이달로스였다. 아버지는 이카로스가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갔다가 밀랍이 녹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 전한 뒤 자신의 날개를 찢어버린다. 사기가 떨어진 크레타 군대는 흩어지고, 공주 파이드라는 자신과 결혼하면 무혈로 왕이 될 수 있다며 테세우스를 설득한다. 미노스 왕은 폐허가 된 궁전에서 잠이 들듯 숨을 거둔다. 다이달로스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날개가 아니라 사랑하는 법이라며, 날개 없는 승리의 여신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 ‘이카로스를 애도함’, 테이트 브리튼.
황소 도약 벽화, 이라클리오 고고학 박물관.
크노소스 궁전의 목조 모형, 이라클리오 고고학 박물관.

살아 있는 박물관

이라클리오 고고학 박물관에서 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하나씩 만난다. 카잔차키스가 막 발굴된 프레스코의 인물을 소설에 그렸음은 명백하다. ‘백합의 왕자’는 늠름한 테세우스를 연상시킨다. ‘파란 옷의 여인들’의 정교하게 올린 검은 머리카락, 드러낸 가슴, 풍성한 치마는 르네상스에 그려진 듯 생생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투우’는 소설에서도 핵심 장면 중 하나다. 한 사람은 거대한 황소의 뿔을 잡고, 또 다른 사람은 황소 등 위로 공중제비를 넘으며, 또 한 사람은 뒤에서 착지를 돕는 세 단계의 동작을 하나의 화면에 담았다. 오늘날 프랑스에도 뿌리가 남아 있는 이 투우는 황소를 숭배하던 크레타의 민속이다. 왕의 노여움을 샀다가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소녀 크리노는 이 제전에서 황소를 뛰어넘는 경기에 출전해 날렵하게 성공한다. 미노스 왕은 크리노를 해하려고 술 먹인 소를 내보내지만, 이카로스의 기지 덕에 크리노는 무사히 경기를 마친다. 카잔차키스가 청소년을 위해 연재한 소설임에도 활동사진 같은 그림 덕분에 어른인 나도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었다.
카잔차키스의 소설에서 눈에 띄는 점은 아리아드네의 변심이다. 신화는 테세우스와 떠난 그녀가 낙소스에 도착해 잠들었을 때 버림받은 것으로 그렸다. 사실 원전에서 가장 석연치 않던 부분이다. 신이 인간에게 버림받은 여인을 거둬 아내로 삼는다는 이야기는 늘 어딘가 궁색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거꾸로 자유분방한 그녀가 직접 디오니소스를 선택한다. 덕분에 테세우스가 그녀의 언니 파이드라와 맺어진다는 뒷이야기가 더 자연스럽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소설에 신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오니소스도 테세우스의 추측일 뿐 표범을 거느린 남자이며, 무사(Musa) 클리오도 하리스의 꿈에 등장한다. 마지막에 테세우스가 아테나 여신을 모셔 찬양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했다는 답은 없다. 그리스신화를 소재로 삼으면서도 신을 퇴장시킨다는 건 굉장히 의식적인 선택이다. 전통 신화에서는 아테나 여신이 테세우스를 인도하고, 디오니소스가 아리아드네를 취하며, 모든 사건의 배후에 신의 의지가 작동한다. 그런데 카잔차키스는 기계적인 신의 등장을 전부 걷어내고, 인간만 남겨놓았다. 여기서는 모두 인간이 결단을 내린다. 아리아드네가 실타래를 떠올린 것도 아테나의 계시가 아니라 고양이를 보고 얻은 착상이며,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것도 영웅적 운명이 아니라 아리스티데스가 만든 특수강 단검 덕분이다.

아서 에번스가 발굴해 개수한 크로노스 궁전.

평생 권력의 꼭두각시였던 기술자 다이달로스가 윤리 의식을 되찾는 모습은 카잔차키스가 곧 맞이할 원자폭탄 시대를 예견하면서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핵과 석유를 둘러싼 검은 야욕 때문에 벌어진 중동 전쟁에서 군과 민간을 구별하지 않고 자행된 폭력과 살상이 신화시대 모습과 다르지 않다. 나아가 인공지능의 발달이 가져올 문제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이달로스처럼 눈앞의 이기(利器)를 포기할 수 있을까?
이카로스를 떨어뜨린 태양이 아이게우스를 삼킨 에게해를 달구는 때, 크노소스 궁전을 나서며 현지 가이드 마리아에게 물었다. 미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수없이 그 질문을 들었을 그녀의 답은 완벽했다. “궁전 자체가 미로다.” 우리는 지금 미로 안에 있다.

  • 글·사진 정준호(문화 칼럼니스트)
  • 에디터 김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