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ful Wineries
대지의 좋은 기운을 듬뿍 받는 장소에 자리한 너른 와이너리는 예술을 펼쳐낼 최고의 캔버스가 되기도 한다. 일관된 철학에 기반한 아트 컬렉션, 장소 특정적 설치미술, 아이코닉 건축물까지. 와인 생산을 넘어 독보적 콘텐츠를 갖추고 ‘예술 여행의 성지’로 자리매김한 와이너리를 소개한다.
VIÑA VIK
안데스산맥의 험준한 지형에 황량한 모래와 자갈,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깊은 계곡까지, 칠레의 와이너리는 대개 거친 날것의 자연 속에 자리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너른 자연 속에서 야심 찬 와인 사업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바로 ‘자신만의 와인 제국’을 만드는 것이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약 2시간 떨어진 미야우에밸리에서 이 특별한 모험을 감행한 이는 노르웨이 출신 기업가 알렉산데르 비크다. 그는 ‘남미 최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약 2년에 걸쳐 칠레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전역을 조사한 끝에, ‘황금의 땅’을 의미하는 미야우에밸리에 자리 잡고 ‘비냐 비크’를 설립했다. 약 4400헥타르에 달하는 광활한 부지에 거대한 포도밭과 자연림이 펼쳐지고, 그 안에 와이너리 건물과 ‘비크 칠레(Vik Chile)’ 호텔이 함께 자리한다. 최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집요한 목표와는 별개로, 이곳은 건축과 자연, 예술을 통합한 경험을 선사하며 국제적 ‘와인 여행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비냐 비크의 철학을 건축가 스밀한 라딕(Smiljan Radić)이 강렬한 비주얼로 구현한 와이너리 건물은 하나의 대지예술을 연상시킨다. 크고 작은 바위가 자연스럽게 흩뿌려진 거대한 야외 광장은 조각가 마르셀라 코레아의 작품으로, 자연에 대한 철학적 관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비냐 비크의 야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외적으로 ‘건축’과 ‘자연’을 통합하며 연결성을 구축한다면, 비크 칠레 호텔은 다채로운 콘텐츠로 내부를 채우며 예술과 풍경을 함께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호텔은 부지의 산 정상에 위치해 미야우에밸리를 파노라마 뷰로 조망할 수 있으며, 총 29개의 객실은 모두 서로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바탕으로 꾸몄다. 그라피티 룸은 칠레의 거리 예술가 디에고 로아가 참여했으며, 히로시게 룸은 일본 우키요에 거장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마치 에도시대로 공간 이동을 한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이 밖에도 호텔 곳곳에서 칠레 국민 화가 로베르토 마타를 비롯해 안젤름 키퍼, 피트 몬드리안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CHÂTEAU LA COSTE
엑상프로방스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샤토 라 코스트’는 단순한 와인 산지를 넘어 예술과 건축, 자연, 그리고 무엇보다 훌륭한 와인이 공존하는 이상적 장소로 손꼽히는 순례지다. 130헥타르의 포도밭을 포함해 총 200헥타르에 걸친 목가적 풍경 속에 아트 센터와 콘서트홀 등의 건축물을 비롯해 40점이 넘는 예술 작품이 마치 보물찾기하듯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다. 이곳을 경험하는 최적의 방법은 ‘건축 예술 산책로’라 이름 붙은 2시간짜리 투어에 참여하는 것이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아트 센터의 호수 위에 놓인 루이즈 부르주아의 ‘Crouching Spider’를 시작으로 장-미셸 오토니엘의 대형 무라노 유리 십자가 ‘La Grande Croix Rouge’, 리처드 세라의 철로 만든 포르티코 ‘AIX’, 땅에 밀착한 조각상 ‘Mater Earth’, 알렉산더 콜더의 우아한 모빌 ‘Small Crinkly’ 등의 명작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이렇듯 뮤지엄급 퀄리티를 자랑하는 특별한 소장품은 오너 패트릭 매킬런의 집요한 열정에서 비롯했다. 그는 작가들을 와이너리에 초대해 주변을 산책하며 영감을 얻고, 원하는 작품을 원하는 장소에 설치할 수 있도록 전권을 위임했다. 그는 ‘건축’에 대해서도 동일한 접근법을 취했는데, 그 역시 하나의 장소 특정적 설치 작품임을 인지하고 세계적 건축가들에게 자유로이 설계를 맡긴 것. 그 결과 장 누벨의 최첨단 와인 저장고, 프랭크 게리의 음악당 ‘파비용 드 무지크’, 오스카르 니에메예르의 ‘오디토리엄’, 안도 다다오의 예배당, 렌초 피아노의 아트 파빌리온까지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의 마스터피스가 한자리에 모인 경이로운 풍경이 완성되었다. 대지의 지평선과 시선을 나란히 맞춘 렌초 피아노의 공간과 유려한 곡면미가 돋보이는 오스카르 니에메예르의 건축물, 실내 갤러리에서 연중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준 높은 기획전 또한 샤토 라 코스트의 예술적 지평을 꾸준히 넓히고 있다.
CASTEOOL DI AMA
이탈리아 토스카나, 키안티 클라시코의 심장부에 위치한 중세 마을의 와이너리 ‘카스텔로 디 아마’는 독창적인 아트 프로젝트를 통해 그들의 와인과 땅에 대한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이곳에서는 예술가에게 와인메이커와 동일한 수준의 헌신을 요구한다. 테루아와 기후, 사람의 노력이 유기적으로 작용해 한 해의 결실을 맺는 와인처럼, 예술가도 동일한 방식으로 이곳의 본질을 ‘작품’으로 빚어낸다. 시간이 새겨진 작품을 마주하다 보면 와인 메이킹에서 자주 쓰는 ‘정교함(sophisticated)’이나 ‘발효(fermentation)’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단순히 작품을 ‘구매’해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장소와 시간을 선사해 그곳에만 존재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게 하는 접근법은 이들의 아트 컬렉션과 와인을 한층 다층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예술가를 초대해 카스텔로 디 아마의 본질을 해석하게 하는 이 프로젝트는 2000년에 시작되었다. 오너 로렌차 세바스티와 와인메이커 마르코 팔란티는 이 와이너리가 자리한 장소의 특별함을 표현할 수단으로 ‘현대미술’을 선택했다. 프로젝트의 서막을 연 작가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는 와이너리의 정체성을 다각도로 조명한 작품 ‘Ama’s Tree: multiplication and Division of the Mirror’를 선보였다. 이어 2001년 다니엘 뷔랑은 포도밭을 향해 창을 낸 유리 패널 작품 ‘On the Vineyards: Points of View’를 제작해 와이너리에 환상적인 선물을 안겼다. 포도밭과 저장고, 작은 헛간과 마을 오솔길을 아우르는 공간 곳곳에 배치한 작품들의 공통점은 엄숙함이 느껴질 만큼 명상적이라는 것이다. 수백 년 된 석굴 바닥에 분홍빛 점을 찍은 이우환의 ‘Topos’, 로니 혼의 유리 수반 작품 ‘Untitled’, 그리고 3년에 걸쳐 완성한 제니 홀저의 ‘Per Ama’ 등은 수천 년을 이어온 이 땅과 마을의 역사에 대한 겸허하고 깊은 감탄사처럼 다가온다. 명확한 마스터플랜 없이 작가가 작품을 완성할 때를 그 프로젝트의 완결점으로 보는 시각은 와인에 대한 이들의 철학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독보적 ‘문화 모델’로서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MARQUÉS DE RISCAL
스페인 북부 리오하 알라베사의 나른한 풍경 속으로 접어들면, 중세의 고요를 깨뜨리는 비현실적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황토빛 석조 건물이 즐비한 엘시에고 마을 위로 분홍색과 금색, 은색의 티타늄 리본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의 본관 ‘시티 오브 와인’이다. 빌바오 구겐하임,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등 아이코닉 건축물로 명성이 높은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작품으로, 누가 봐도 그의 것이 분명한 건축적 인장이 어느 건물보다 강렬하게 찍혀 있다. 1858년 설립한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로, 2000년대 초반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현대건축의 거장 프랭크 게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햇빛 아래 요동치는 분홍색 티타늄은 레드 와인을, 금색은 와인병을 감싸는 그물망을, 그리고 은색은 병 입구를 봉인하는 캡슐을 상징하며 리오하의 대지 위에 역동적 리듬감을 부여한다. 이렇듯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와이너리를 크고 작은 조각품으로 채우기보다 조각적 요소가 다분한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을 통해 상징성과 화제성을 획득하는 영리한 방식을 택했다. 더구나 건물에 깃든 그 파격과 도전정신을 통해 자사 와인의 정체성까지 함께 드러낸다. 현재 호텔로 운영하고 있는 건물은 ‘머무를 수 있는’ 예술 작품으로, 그 진가는 오히려 밖이 아닌 내부에서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물결치는 티타늄 곡선 위로 덮은 금속 캔틸레버 구조물은 작은 성당과 포도밭의 전원 풍경을 구조적으로 깎아내며 인상적인 ‘뷰’를 만든다. 비정형 지붕이 내부 공간에 선사하는 빛과 그림자의 변주 역시 이 건물이 안기는 또 다른 선물이다. 그뿐 아니라 객실과 로비 곳곳에 게리가 직접 디자인한 가구를 배치해 예술을 경험하는 즐거움을 더한다.
THE DONUM ESTATE
‘대지의 선물’을 뜻하는 ‘도넘 이스테이트’는 캘리포니아 소노마카운티 카네로스 지역에 자리한다. 나파밸리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그 화려함에서 한 걸음 비껴나, 보다 느린 자연의 리듬 속에서 풍경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샌프란시스코만에서 밀려드는 차가운 안개와 바람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이 지역에서는 포도밭이 하루에도 몇 번씩 전혀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2001년 설립된 이곳은 프랑스 샤토 라 코스트에 비견될 만큼 뮤지엄급 아트 컬렉션을 갖춘 ‘아트 와이너리’로 명성을 쌓아왔다. 오너인 홍콩 기반의 컬렉터 앨런 워버그(Allan Warburg)와 메이 워버그(Mei Warburg) 부부가 이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데, 동서양을 아우르는 컬렉션이 균형 있게 공존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포도밭 곳곳에는 약 81헥타르에 걸쳐 50여 점의 대형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아이웨이웨이의 ‘Circle of Animals / Zodiac Heads’를 비롯해 와이너리에 최초로 설치한 잔왕의 스테인리스스틸 조각 ‘인공 바위 No.126’, 그리고 엘름그린 & 드라그셋, 트레이시 에민, 안젤름 키퍼 등의 대작이 자연 속에 자리해 풍경과 긴밀하게 호흡한다. 초기에 워버그 부부의 개인 소장품을 중심으로 컬렉션이 형성되었다면, 최근에는 작가와의 협업을 통한 커미션 작업과 장소 특정적 프로젝트로 확장되고 있다. 2022년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완성한 ‘Vertical Panorama Pavilion’이 대표적 예다. 포도밭 한가운데에 무지갯빛 캐노피 형태로 솟아오른 이 구조물은 대지와 와인의 색채를 시각적으로 구현, 하루에 단 10명의 방문객만 이곳에서 와인을 테이스팅할 수 있다. 2024년 설치한 양 바(Yang Ba)의 사운드 조각 작품 ‘Hyperspace’ 도 경험형 공간을 지향하는 이들의 컬렉션 철학을 잘 보여준다. 가능한 한 많은 대중이 컬렉션을 즐기기를 바란다는 오너 부부의 철학에 따라 다양한 옵션의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향후 컬렉션과 시설 확장에 맞춰 보다 폭넓은 공공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