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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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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인에서 메디치 가문까지.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피렌체가 품어온 기억을 따라간다

바르디니 정원에서 본 베키오 궁전과 두오모.
산타 크로체 성당 앞 단테상.
아카데미아의 미켈란젤로 다윗상.
바르젤로 궁전에 나란히 전시된 도나텔로와 베로키오의 다윗상.

이탈리아에서 어디가 가장 좋으냐고 물으면 나는 “규모로는 로마고 진귀하기로는 베네치아지만, 가장 친근한 도시는 피렌체”라고 답한다. 피렌체 기행을 시작하며 내가 왜 이 작은 도시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펴보려 한다.
기원전 8~6세기, 에트루리아인은 홍수가 날 때마다 범람하는 아르노 유역 대신 북쪽 피에솔레 언덕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보는 해넘이는 특히 아름답다. 피렌체 사람들은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를 로마가 아닌 에트루리아인의 후예로 보았다. 기원전 4~3세기에는 로마가 원주민을 정복하고 플로렌티아(Florentia)를 건설했다. 1099년에 기사 파치노 데 파치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부싯돌 세 개를 가져왔다. 이 부싯돌은 오늘날까지도 피렌체의 대표적 전통 행사인 부활절 ‘불꽃 수레 축제(Scoppio del Carro)’를 점화하는 데 사용된다. 두오모 성당에서 날린 모형 비둘기가 광장의 수레에 불을 붙이면 폭죽이 터지고, 비둘기가 무사히 성당으로 돌아오면 한 해가 평안할 것이라 믿는 민간신앙이다.
이탈리아 반도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피렌체는 중세에 양모 산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영국산 양모를 가공해 유럽 전역에 고급 직물로 판매하며 부를 축적했다. 돈이 모이자 자연히 어음을 발행하는 금융업이 자리 잡았다. 피렌체의 은행가들은 모직물 산업 대금 결제를 넘어 국제 지점망을 통해 교황청으로 가는 자금을 관리하기도 했다. 1278~1296년, 모직물 조합은 위상에 걸맞은 대성당을 짓기로 한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산타 크로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가 이 시기에 차례로 착공됐다. 700년이 넘도록 피렌체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온 건축물이다. 1348년 도시에 흑사병이 번지자 귀족들은 피에솔레 기슭으로 피신했다. 보카치오는 이 경험을 ‘열흘의 이야기’, 곧 <데카메론>으로 펴내 인간의 본성인 애욕(愛慾)을 풍자했다. 곧이어 백년전쟁을 치르기 위해 막대한 돈을 빌린 영국이 부도를 내자 피렌체 금융 가문 또한 연이어 파산했다. 그리고 1397년, 교황청 재정 업무를 경험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새 은행을 세웠다. 1401년 세례당 목조문을 청동으로 바꾸는 공모전에서는 로렌초 기베르티가 당선되었다. 공동 우승에 반발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로 떠났다. 이후 1419년 브루넬레스키가 르네상스 첫 공공 건축물인 인노첸티 보육원을 설계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버려진 아이를 맡아 키운 자료를 아직도 보관 중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남긴 징표도 함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거장 프랑코 체피렐리 감독도 이 보육원 출신이다.

바사리가 완성한 베키오 궁전 내 500인 홀.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된 코시모 1세, 위대한 자 로렌초, 국부 코시모의 초상.

메디치 공화정 시대

1420년, 메디치 가문의 수장 코시모 데 메디치는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은 두오모의 지붕을 덮는 사업을 공모한다. 로마 판테온에서 영감받은 브루넬레스키가 당선됐다. 1434년 공화정을 장악한 혐의로 추방된 코시모가 1년 만에 베네치아에서 돌아와 전보다 더욱 지배력을 넓힌다. 1436년에는 브루넬레스키의 돔이 완공되었다. 건축사의 쾌거였다. 봉헌식에서 기욤 뒤파이의 성가 ‘여기 장미꽃 피었네(Nuper rosarum flores)’가 연주되었다. 모두 천상의 소리라고 생각했다.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는 뒤파이를 브루넬레스키나 기베르티보다 위대한 예술가라고 평가했다. 관광객 중 그 진가를 아는 사람은 소수지만, 뒤파이가 피워낸 장미가 바로 ‘꽃피는 도시’라는 뜻의 피렌체다. 1440~1460년, 코시모는 가문의 독재를 우려하는 시선을 의식해 친구이자 조각가 도나텔로에게 ‘다윗’과 ‘유딧’을 주문한다. 힘센 외세에 맞서 조국을 구해낸 성서의 영웅들이었다. 1469년에는 병약한 피에로에 이어 두 아들 로렌초와 줄리아노가 가문을 이끈다. 이후 1478년 ‘부싯돌’의 파치 가문이 교황과 내통해 메디치 형제의 암살을 꾀한다. 두오모 미사 때 감행된 음모에서 줄리아노는 즉사했지만, 성구실로 피신한 로렌초는 겨우 목숨을 건진다. 로렌초는 시민의 지원에 힘입어 파치 일당을 단죄한다. 식인 연쇄 살인범을 다룬 시리즈 영화 <한니발>에서 앤서니 홉킨스는 파치 성(姓)을 가진 형사를 선조와 같은 방식으로 베키오 궁전에 매달아 잔인하게 살해한다. 1482~1485년, 로렌초의 친구이자 화가 보티첼리는 메디치 방계의 주문으로 ‘봄’, ‘베누스의 탄생’ 같은 걸작을 완성한다. 이 방계가 뒷날 피렌체 군주정을 이끌 뿌리였다. 1489년에는 소년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조각 정원에 들어와 로렌초의 양자가 된다. 1491~1498년에는 수사 사보나롤라가 메디치의 사치를 꾸짖으며 ‘허영의 소각’을 부추긴다. 하지만 피렌체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보나롤라도 머지않아 실각해 화형당한다. 지금도 시뇨리아 광장에 그를 처형한 자리가 남아 있다. 사보나롤라의 영향을 받은 보티첼리는 ‘루크레치아’와 ‘아펠레스의 비방’을 그렸고,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조각했다. 메디치 가문은 숙원 사업이던 교황 배출에 성공한다. 1513년 미켈란젤로와 형제로 자란 조반니가 레오 10세로, 1523년 조반니의 사촌이자 암살된 줄리아노의 아들 줄리오가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즉위했다. 일찍부터 예술적 안목을 키운 레오 10세는 결국 바닥난 곳간을 채울 무리한 면죄부 발행으로 루터의 반발을 샀다. 야심가 클레멘스 7세는 또 다른 바람을 이뤘으니, 1532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공작으로 임명해 공화정을 끝내고 군주제를 열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성당.
산타 트리니타 다리에서 본 베키오 다리.
두오모를 바라보는 코시모 1세 기마상.

토스카나 대공국 시대

1537년 끊어진 메디치 장자 계열을 방계의 코시모가 이어받아 토스카나 대공국 시대를 열었다. 1539년 나폴리의 엘레오노라와 결혼한 코시모 1세는 아내를 위해 피티 가문의 궁전을 매입했고, 정원도 조성했다. 1554년 벤베누토 첼리니가 시뇨리아 광장, 존경하는 미켈란젤로의 ‘다윗’을 바라보는 자리에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를 세웠다. 1560년에는 코시모 1세의 명을 받은 바사리가 공관 ‘우피치’를 완공했다. 1573년 조반니 데 바르디가 카메라타 모임을 열어 고대 그리스 비극의 재현을 꾀했다. 1589년에는 페르디난도 1세가 인척 로렌의 크리스티나와 결혼했다. 피로연을 위한 무대 공연 <순례하는 여인>이 메디치 예술의 정점을 선보였는데, 사실상 오페라의 시작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통치 아래 군주제에 접어든 피렌체는 르네상스 시기 같은 창조력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1737년 잔 가스토네가 사망하면서 한 시대의 막을 내린다. 그의 누나 마리아 안나 루이사는 가문의 보물을 국외 반출하지 않는 조건으로 국가에 헌납한다.
1786년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괴테는 로마를 빨리 보고 싶다는 변명으로 피렌체에 단 3시간 머물렀다. 이후 1850년대, 영국의 라파엘 전파 화가들과 평론가 존 러스킨 등이 보티첼리를 비롯한 피렌체 르네상스 회화의 거장들을 재평가했다. 1865년에는 산타 크로체 광장에 탄생 600주년을 맞은 단테의 동상을 세웠고, 때맞춰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천도했다. 1871년 다시 수도가 로마로 옮겨져 피렌체 사람들은 실망했다. 1891년 독일 미술사가 아비 바르부르크가 보티첼리 논문으로 도상학 시대를 열었고, 1900년 빌라 이 타티를 매입한 미국 미술사가 버나드 베런슨이 미국 부호들에게 피렌체 걸작을 중계했다. 빌라는 현재 하버드 대학교 연구소가 되었다. 1966년 11월 4일 피렌체에 대홍수가 덮쳐 도시가 진흙과 보일러 유출 경유로 범벅이 되었다. 마침 그해 부활절 불꽃 축제 모형 비둘기가 성당으로 돌아오지 못해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 각지, 심지어 일본의 자원봉사자가 피렌체로 달려갔다. 인간 사슬을 만들고, 문화재를 닦고 나른 이들을 피렌체 사람들은 ‘진흙의 천사들’이라 불렀다.
내가 피렌체에서 받은 인상이 꼭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늘날의 피렌체는 미켈란젤로와 바사리, 첼리니 같은 예술가, 그리고 오페라를 부활시킨 카메라타 동인들이 활동하던 시기만큼 창의적일 수 없다. 눈부신 피렌체 예술은 대중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그저 소비될 뿐이다. 나 같은 ‘장삼이사’마저 뻔질나게 드나드니 오죽하랴! 남은 연재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피렌체를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려 한다.

  • 글·사진 정준호(문화 칼럼니스트)
  • 에디터 김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