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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앵 잘레와 나와 고헤이가 만들어낸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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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조각이 되고, 조각은 춤이 된다. 다미앵 잘레와 나와 고헤이가 창조한 낯선 행성에서 마주한 제3의 미학.

다미앵 잘레(왼쪽)와 나와 고헤이.

다미앵 잘레

현재 전 세계 예술계에서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벨기에 출신 안무가. 몸의 무한한 가능성을 독특한 시선과 방식으로 그려내는 잘레는 시각예술, 음악, 영화, 연극, 패션을 넘나드는 혁신적 협업을 통해 춤이라는 예술 형식을 끊임없이 재정의한다. 대표적 협업자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앤터니 곰리, 나와 고헤이, 음악가 톰 요크, 류이치 사카모토, 마돈나, 다프트펑크의 토마 방갈테르, 영화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과 자크 오디아르 등이 있다. <에밀리아 페레즈>와 <서스페리아> 등의 영화에서 안무를 맡으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고, 전 세계 유수의 무용단들과 안무 작업도 진행 중이다.

나와 고헤이

일본 교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조각가. 디지털 시대 실체와 가상, 물질과 비물질, 자연과 인공, 과학과 예술 간 경계와 변형을 탐구하며 이를 조각, 회화,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구현한다. 인간 지각과 물질성을 연결하는 인터페이스로서 조각의 ‘표면’에 집중하며, ‘세포(입자, 단위)’ 개념을 중심으로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선보이고 있다. 조각의 가능성을 유연하게 재정의함으로써 사물의 물질적 특성이 관람자에게 서서히 드러나는 새로운 지각 경험을 선사한다. 2018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에 조각 작품 ‘Throne’이 특별 전시됐고, 2023년 야외 조각 ‘Ether(Equality)’가 프랑스 센강 세갱섬에 영구 설치되기도 했다.

올해 6월 GS아트센터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한 <프리즘> 쇼케이스. 다미앵 잘레와 나와 고헤이의 최신 협업 프로젝트로, 프리즘 시트로 덮인 투명 상자 속 끊임없이 굴절되고 변형되는 신체를 통해 실재와 가상, 그 사이 경계를 탐색한다. ⓒ Photograsshopher, GS Arts Center.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듯 서로 다른 물질이 만나 새로운 물질이 탄생하는 순간. 예술 분야에도 이러한 화학반응이 존재한다. 안무가 다미앵 잘레(Damien Jalet)와 조각가 나와 고헤이(Kohei Nawa)의 협업이 그렇다. 두 사람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던 독창적인 장면을 만들어왔다. 언어와 문화, 장르와 매체를 초월해 어떤 경지에 이른 두 사람의 작품을 단지 ‘장르를 초월한 무대’로만 해석하기엔 아쉽다. 조각과 춤의 경계가 흐려지며 관객이 몸과 물질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는 그 완벽한 융합의 시간은 <플래닛[방랑자]Planet[wanderer])>라는 작품 제목처럼 미지의 행성을 마주하는 일에 가깝다. GS아트센터 ‘예술가들’ 시리즈의 일환으로 서울을 찾은 두 사람을 만났다.

두 분의 인연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미앵이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고헤이의 설치 작품 ‘Foam’을 본 것이 계기였다죠. 다미앵이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연락처를 물어 연락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고요.
다미앵 잘레(이하 다미앵) 그건 본능적인 끌림이었어요. 작품을 보는 순간 어떤 가능성과 동시에 확신이 일었고,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재밌는 건 그 작품을 불과 전시 끝나기 10분 전에 봤다는 거예요. 짧지만 무척 강렬했죠. 인공 거품이 구름처럼 부풀어 올라 하나의 풍경을 만들었는데, 폐쇄된 공간 속에 있지만 놀라울 만큼 유기적 생명력을 품고 있었어요. 그 후 실제로 함께 작업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이듬해인 2014년부터 협업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2015년 프랑스 정부가 운영하는 교토 예술가 레지던시 ‘빌라 구조야마(Villa Kujoyama)’의 듀오 프로그램에 선정돼 몇 달간 함께 체류했어요. 시작까지 거의 2년이 걸린 셈이죠. 나와 고헤이(이하 고헤이) 처음 다미앵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정확히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어요.(웃음) 하지만 평소 현대무용을 비롯한 무대예술에 관심이 있었기에 좋은 기회가 될 거라는 예감은 들었습니다. 사실 이건 다미앵에게도 처음 하는 말인데, 당시 다미앵의 웹사이트를 살펴보다 이라는 댄스 필름에서 사슴 뿔을 달고 움직이는 모습을 봤어요. 사슴은 제게도 무척 신비로운 존재여서 단번에 호기심이 생겼죠. 아시아 문화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다미앵의 태도도 흥미로웠어요. 그래서 한번 만나봐야겠다 싶었습니다.

거대한 우주 속 흔들리고 방랑하는 인간의 몸을 살아 움직이는 조각처럼 강렬하게 표현한 <플래닛[방랑자]>. © Rahi Rezvani.

그렇게 첫 협업의 결과물인 <베셀(Vessel)>의 첫 번째 버전을 2015년 선보인 후, 이듬해에 정식 초연을 거쳐 지금까지 다섯 편의 작품을 함께 만들었어요. 교토에 위치한 나와 고헤이의 창작 플랫폼 ‘샌드위치(Sandwich)’ 스튜디오에서 리서치와 워크숍을 진행하는 것으로 아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고헤이 협업 초반 다미앵이 교토에 와 몸의 형태와 움직임에 대한 다양한 리서치를 공유했어요. 함께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실제 무용수들과 워크숍을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죠. 인근 미술대학 학생들과 샌드위치 스태프, 무용수들이 모여 몸에 관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신체뿐 아니라 재료도 탐구하고 싶었어요. 다미앵이 춤을 통해 상상하는 세계를 다양한 물성과 결합한다면 무대 위에서 누구도 본 적 없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점차 커졌습니다. 그렇게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하나씩 제안한 게 지금의 결과를 낳았어요. 저희가 10년 동안 협업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둘의 끊임없는 상상력 덕분입니다. 워크숍을 할 때마다 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한 작품 안에 절대 담을 수 없는 정도죠. 그래서 여전히 앞으로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해요.

조각과 안무는 무척 다른 장르입니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교차할 때 탄생하는 ‘제3의 미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고헤이 저는 재료도 춤을 춘다고 생각합니다. 재료의 물성을 충분히 끌어내면 소재도 안무로 만들 수 있어요. 즉 제3의 미학은 무용수의 춤과 재료의 춤이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고 봅니다. 저는 조각가로서 인간과 공간은 무엇이고 물질은 공간 속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인간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지 같은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무용수의 몸도 하나의 물질이고, 다미앵의 안무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그 과정에서 재료 역시 함께 변화하죠. 이 둘이 만나는 순간, 물질은 더 이상 고정된 오브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존재가 됩니다. 무대는 빛과 안개, 바람 같은 요소를 끝없이 변화시킬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제게는 언제나 새로운 도전입니다. 평소 시도할 수 없던 영역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죠. 다미앵 이번 협업은 단순한 조각과 무용의 만남을 넘어선다고 생각해요. 고헤이 같은 시각예술가와 함께 작업하면 춤이라는 장르가 훨씬 더 큰 맥락으로 확장됩니다. 새로운 세계와 논리를 구축할 수 있게 되죠. 서로 다른 매체가 결합해 하나가 되는 순간 몸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암시하게 되고 더 극적으로 변형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관객이 몸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죠. 우리 협업은 각 요소를 단순히 더한 것 이상의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처음부터 서로의 작업을 활성화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안무와 무대를 떼어낼 수 없는, 완전히 융합된 작품 말입니다. <플래닛[방랑자]>의 경우 무대와 재료를 빼고 동작만 보면 솔직히 지루해요. 환경과 상호작용하도록 설계한 것이니까요. 이번에 GS아트센터에서 세계 최초로 선보인 신작 <프리즘(Prism)>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대 위 조각은 그 자체로도 꽤 흥미롭지만 무용수들이 그 안에서 움직일 때 비로소 완성돼요. 제 작업이 배제된 고헤이의 무대미술은 큰 의미가 없고, 반대로 그의 미술이 없는 제 안무 역시 이 작품에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해온 대부분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불가분의 연결 고리’를 만드는 과정이었어요.

네덜란드의 안개를 모티브로 자연의 순환과 신체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담아낸 댄스 필름 <미스트(MIST)>. © Rahi Rezvani.

두 분은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세계적 아티스트예요. 그토록 확고한 예술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들의 협업이 순조롭지만은 않았을 거예요. 언어와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요. 의견이 충돌할 땐 없었나요?
다미앵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고헤이의 영어가 지금처럼 유창하지 않아 소통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하지만 덕분에 우리 대화는 훨씬 더 직관적이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흘러갔죠. 언어보다 이미지와 재료, 고헤이가 제안하는 물성이나 감각을 통해 서로를 이해했습니다. 구조야마 레지던시에 머물 때 제가 오랫동안 함께해온 무용수의 사진을 고헤이에게 보여준 적이 있어요. 얼굴을 숨긴 채 몸을 왜곡하는 순간이었는데, 낯선 생명체처럼 보이는 이미지였죠. 그걸 보고 고헤이가 협업에 훨씬 적극적으로 몰입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우리는 무엇을 만들게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최종 결과물이 공연일지, 설치 작품 혹은 조각일지조차 몰랐죠. 결과보다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에 집중했어요. 언어가 잘 통했다면 오히려 너무 빨리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몰라요. 그러지 않아서 훨씬 더 직관적이고 신체적이며 조금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함께 작업할 수 있었어요. 의견이 부딪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럴 땐 자연스럽게 주파수를 다시 맞추는 시간을 가졌어요. 좋은 협업을 위해서는 때로 자신의 방식을 내려놓고 지름길 대신 우회로를 택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젠 고헤이도 좋은 안무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저 역시 그의 팀이 일하는 방식을 이해해요. 흥미로운 점은 고헤이가 안무에도 자연스럽게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동작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반대로 제가 무대미술에 대한 제안을 던지기도 해요. 협업이란 그래야 하는 것 같아요. 너무 예의만 차리다 보면 진정한 접점이 생기지 않죠. 상대방의 세계로 뛰어들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해요.

<플래닛[방랑자]>는 감자 전분, 슬라임, 안개, 모래 등 다양한 재료가 무용수들의 몸과 한데 얽혀 상당한 시각적 충격을 선사합니다. 거대한 우주 속 흔들리고 방랑하는 몸짓이라는 설정은 어디서 출발했나요?
고헤이 <플래닛[방랑자]>를 구상할 때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많은 제약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팬데믹 종식 이후에도 전쟁이 일어나고 정치적 균형이 흔들리는 등 수많은 일이 이어졌죠. 지금 이 세계 자체가 매우 기묘하고 불안한 분위기 속에 있다고 느꼈어요. 사람들은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았고요. 그러한 불안정함과 기이함을 무대라는 공간과 안무를 통해 관객이 직접 몸으로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다미앵 지난 10년간 고헤이와 함께 선보이고자 한 것은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인간 존재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거였어요. 현재 인류가 이 땅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건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와 적응, 생존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를 은유적이면서도 물질적인 방식으로 무대 위에 담고 싶었어요. 우리 작업에는 디지털 기술이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몸과 재료, 빛과 소리만으로 하나의 경험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작품 곳곳에 신화적 모티브가 녹아 있습니다. 공연 초반 땅에서 솟아나는 여성 댄서의 몸짓은 생명과 혼돈을 동시에 품은 가이아를 상징하고, 댄서들이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며 모였다 흩어지는 순간은 대륙이 갈라지고 생명이 퍼져나가는 판게아 과정에 대한 은유입니다. 극 후반부 천장에서 쏟아지는 점액질은 행성마다 다른 물질이 존재할 거라는 상상에서 출발했습니다. 신화뿐 아니라 과학에도 뿌리를 두었어요. 작품 중간 무용수들이 천천히 걷는 장면은 직립보행이라는 인간 진화의 중요한 전환점을 떠올리게 하고, 그때 흐르는 음악은 보이저 탐사선에 실린 골든 레코드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세계관을 다 설명하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겁니다.(웃음)

두 분의 작업에서는 무용수의 몸과 조각, 재료가 서로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저는 그 과정이 AI는 재현하기 어려운,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창작의 영역처럼 느껴졌어요. AI 시대에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감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고헤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세포로 이루어지고 미생물부터 동식물, 인간은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AI는 인간의 지성을 외부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일 뿐이죠. 다만 AI를 독립적으로 발전시키고 너무 많은 것을 맡겨버리면 인간성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점을 우려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 우리의 신체 감각으로 돌아가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다미앵 20년 넘게 이 분야에서 작업해왔는데 요새만큼 ‘몸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우리는 오랫동안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적이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들어왔어요. 몸 역시 무언가를 생산하는 도구로 여겨왔고요. 그런데 이제는 AI가 상당 부분을 대신할 수 있게 됐죠. 운전자 없는 자동차가 등장하고, 종업원 없는 레스토랑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더 많은 곳에서 몸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우리 신체는 ‘쓸모’만을 위해 존재하진 않습니다. 몸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한 도구예요. 그렇기에 감정과 감각이 매우 중요하며, 그 부분만큼은 AI가 대체할 수 없죠. 우리는 느끼고 경험하며 저마다 주관을 갖기 위해 존재합니다.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주관성과 불완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 에디터 윤정훈
  • 사진 박규태(인물), GS아트센터(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