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김순영의 봄 | Noblesse

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소프라노 김순영의 봄

CULTURE

뮤지컬 <팬텀>이라는 뜨거운 여름을 지나 무르익은 가을과 긴 겨울을 건너온 소프라노 김순영. 그가 맞이한 봄은 바로 지금이다.

드레이프 넥 플리츠 맥시 드레스 PORTS 1961

2015년 뮤지컬 <팬텀> 국내 초연 당시, 성악가에게는 무모한 도전이라 여겨질 정도의 과감한 시도로 주인공 ‘크리스틴’ 역을 맡은 소프라노 김순영은 그 끝에서 ‘순크리’라는 애칭을 얻을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그는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의 전설적 소프라노 ‘패티’ 역은 물론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라보엠>, <카르멘> 등 다양한 무대를 넘나들며 활동을 이어왔다. 하지만 그에게 각 무대는 치밀하게 설계된 계획의 결과라기보다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마주해온 시간의 축적에 가까웠다. 그의 행보는 때로는 새로운 장르를 향해 과감히 발을 내딛고, 또 때로는 오페라 무대라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며 음악 세계를 조금씩 넓혀온 과정이었다. 그렇게 크고 작은 선택과 도전을 거치며 쌓인 경험은 결국 자신에 대한 단단한 믿음으로 이어졌고, 그 믿음은 지금의 김순영을 이 자리까지 이끌어온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여정의 중심에는 언제나 ‘노래’가 있었다. 무대의 크기나 장르와 상관없이 음악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과 조용히 맞닿을 때, 그는 다시 노래해야 할 이유를 발견한다. 화려했던 순간을 지나 보다 깊어진 시간 속에서 음악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김순영을 만났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와 가까운 시간을 보내왔다고 들었어요. 노래는 언제부터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나요? 돌이켜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노래에 대한 애정이 제 삶의 한 부분을 크게 차지한 것 같아요.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서슴없이 독창 무대에 서거나 노래 대회에 나가곤 했거든요. 중학생 시절에는 합창단 활동도 꾸준히 했고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어요. 그렇게 삶에서 노래가 끊이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래가 제 길이라 여긴 게 아닐까 싶어요. 거창한 이유라기보다 ‘노래하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한양대 성악과를 졸업한 뒤 만하임 국립음대 대학원에 진학하며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했죠.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유학 가기 전에는 단순히 ‘내가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가’에 집중한 것 같아요. 그런데 독일에서 카타리나 다우 교수님을 만나면서 ‘표현력’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됐죠. 교수님 방에는 큰 거울이 있었는데, 늘 그 거울을 보며 노래해야 했거든요.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빛으로 노래하는지 살피면서 표현의 깊이가 달라진 거죠. 그 경험을 통해 무대를 대하는 태도도 훨씬 성숙해졌다고 생각해요.

2015년 뮤지컬 <팬텀>에서 크리스틴 역을 맡는 도전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크리스틴 역할을 제안받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장 믿고 의지하는 정기옥 교수님께 자문을 구했어요. 주변에서 “뮤지컬을 하면 클래식으로 돌아오기 어렵다”며 말리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정기옥 교수님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라고 용기를 주셨어요. 장르를 떠나 앞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넓어질 거라고 말씀하셨죠. 실제로 <팬텀> 이후 더 많은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있었고, 클래식 기반도 더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정통 클래식 성악가로서 장르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가장 고민한 지점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오페라 무대에 다시 서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편견이 가장 두려웠어요. 동시에 지금이 아니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 것 같다는 확신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갈망도 있었고요.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발성에 대한 걱정이 가장 컸죠. 뮤지컬을 하다 보면 클래식 발성이 무너지기도 하거든요. 다행히 <팬텀>에서 크리스틴이 오페라 가수로 등장하는 설정이라 무리하게 발성을 변형할 필요는 없었어요. 동시에 오페라 작품을 병행하고 꾸준히 발성 연습을 이어가면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습니다. 오히려 뮤지컬 이후 발성이 더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어 내심 뿌듯하기도 했어요.(웃음)

그렇다면 <팬텀>은 음악 인생에서 어떤 전환점을 만들어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음악을 넘어 삶의 시야를 넓혀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이전의 저는 앞만 보고 무작정 달리는 경주 마 같았거든요. <팬텀>을 통해 차안대를 벗고 주변을 둘러보는 느낌이었어요. 삶의 어느 한 부분에 집착하지 않는 여유도 생겼고요. 그래서 제게 <팬텀>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작품이라는 의미를 넘어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준 결정적 경험이었어요.

장르를 확장하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결국 제 클래식 발성을 통해 음악적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느냐가 기준인 것 같아요. 어떤 장르든 무대 위에서는 최상의 역량을 보여야 하니까요. 다른 뮤지컬을 제안받더라도 클래식 발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면 결국 고사하게 되더라고요. 클래식 무대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기준은 분명한 것 같아요.

장르적 확장을 경험한 이후에도 여전히 오페라 무대가 음악적 정체성의 중심을 이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페라는 제게 소프라노로서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예요. 한 작품을 오래 탐구하며 음악적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오페라의 큰 매력입니다. 뮤지컬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몇 달간 공들여 준비한 공연을 단 몇 번의 무대에서 쏟아내야 하잖아요. 다시는 오지 않을 그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게 되죠. 그래서 공연이 끝난 뒤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큰 보람을 느끼곤 해요.

옐로 니트 톱 AKRIS, 하이웨이스트 슬림 롱 스커트 LE17SEPTEMBRE

다양한 작품을 거치며 특별히 자신과 깊게 연결된다고 느낀 역할이나 인물이 있다면요?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를 연기할 때 특히 깊이 와닿았어요. 누구나 삶에서 힘듦과 비참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기하면서 제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떠올리며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어요. 그 과정 자체가 일종의 안도감이자 위로였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깊은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았어도 그 고통이 작품에서 승화되는 경험을 하며 시련이 결코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느꼈죠.

소프라노 김순영이 부르는 한국 가곡에서는 특히 깊은 감정의 결이 드러난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한국 가곡의 정서 속에서 자신만의 강점이 유독 빛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한국 가곡은 우리말 시어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그 언어에 담긴 의미와 감정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관객에게 전해지는 메시지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노래를 부를 때 음악뿐 아니라 시어를 먼저 오래 곱씹어보려고 해요.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을 넘어 시어의 의미와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제가 가진 에너지를 온전히 전하는 일이라고 할까요. 그런 순간에 관객과의 ‘감응’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여정을 돌아볼 때, 시기별로 어떤 고민과 변화가 있었나요? 30대 중반까지는 ‘노래를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제 소리 자체에 집중하는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 <팬텀>을 기점으로 생각이 훨씬 입체적으로 바뀌었죠.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상대 배역과의 호흡과 소통도 중요하게 여기게 됐고요. 40대에 들어서는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 시기를 겪기도 했는데, 그 시간을 지나며 불필요한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음악을 할 때도 여유가 생겼죠. 뭔가를 더 잘하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저를 보여주는 데 의미를 두게 된 덕분이에요. 지금도 그 연장선에 있고요. 만약 제가 가장 행복한 시기가 언제였는지 묻는다면 지금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뮤지컬 <팬텀>으로 화려하고 뜨거운 여름 같은 시기를 만나 기쁨과 환희를 만끽했지만, 부드럽고 따스한 봄 같은 지금이 오히려 더 편안해요.

보다 원숙해진 지금, 가장 집중하고 있는 음악적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요즘은 이전에 시도하지 않던 오페라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소리도 변하거든요. 볼륨과 깊이가 더해지면서 지금 이 시기에만 낼 수 있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또 최근에 타이베이에서 ‘천인교향곡’이라는 말러의 교향곡 8번을 연주했는데, 말러 작품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어요. 앞으로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올해 KBS교향악단 음악감독으로 선임된 정명훈 지휘자와 함께하는 정기 연주회를 앞두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4월 17일과 18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콘서트 버전 공연에서 협연할 예정이에요. 정명훈 선생님과는 2024년 부산시향과 함께 <라 트라비아타>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선생님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에너지와 눈빛의 진정성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음악에 거짓 없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다시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요? 소프라노로 계속 활동하는 동시에 후배 성악가들을 키우는 등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옆에서 지켜보면 각자 재능과 부족한 점이 보이거든요. 그것을 잘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음악적인 것뿐 아니라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마지막으로, 소프라노 김순영에게 ‘노래’는 어떤 의미인가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선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목소리는 원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노래라는 선물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한 마음이에요.

  • 에디터 손지수
  • 사진 김제원
  • 헤어 & 메이크업 김민지
  • 스타일링 이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