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깨어난 전통
일상의 전통 미학을 되살리고, 한국 차 문화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큐레이션 스튜디오 ‘로해’의 공간을 찾았다.

복잡한 삼성동에서 떨어져 나온 듯 홀로 고즈넉하게 자리한 ‘로해’. 조선 초기 문인 김시습의 18대손이자 헤리티지 큐레이터인 김동현이 이끄는 이곳은 지난 9월에 문을 연 이후 감각적인 티 하우스로 주목받아왔지만, 그 기저에는 차를 매개로 한국적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역할에 더 큰 의의를 두고 있다.
로해의 출발 배경에는 김동현 대표의 독특한 이력이 있다. 미술사를 전공한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휘트니미술관 등에서 연구 활동을 한 뒤 2019년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국 전통을 보다 정제된 방식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졌다. 이에 철저한 연구를 거쳐 한국 문화 전반을 소개하는 큐레이션 스튜디오 로해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신세계 더 헤리티지, 온지음 등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슬 로(露)에 이슬 기운 해(瀣)를 더한 로해는 매월당 김시습의 철학을 늘 강조하던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선불교적 관점에서 차는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는 마실 것으로 여겨지는데, 아마도 할아버지가 ‘차 생활에 정진하라’는 의미를 담아 지으신 게 아닐까 싶어요. ‘이슬 기운 해’ 자는 흔히 사용하지 않는 한자지만, 차를 비롯해 차의 에너지가 미치는 주변까지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를 지녀 더욱 뜻깊게 느껴집니다.”

로해의 공간은 앞서 말했듯이 단순히 차를 마시기 위한 장소로 한정하기 어렵다. 김동현 대표는 어릴 때부터 생활화해온 차 문화와 함께 선조인 김시습의 시문집 <매월당집>에 기록된 차 생활 관련 73수의 시에서 영감받아 그 정신과 철학을 오늘날 언어로 이어가고 있다. 이를 대표하는 개념이 바로 ‘망형(忘形)’이다. ‘형식에 치우지 말고 진의를 알아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의미가 함축된 것으로, 한국 차의 본질은 정신성과 태도에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차 자체가 절대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에요. 차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고, 혼자만의 여유를 만들어주는 매개체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로해에서는 차가 중심이 되는 것을 지양합니다. 이곳을 ‘차 공간’이라고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요. 그 때문에 방문하는 분들에게는 입구에서부터 공간 곳곳에 깃든 의미나 로해의 철학을 차근히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후 차를 내어드릴 때도 저와 직접 소통하기도 하고요. 차는 그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역할을 해요.”
자연 소재의 질감이 살아 있는 흙벽, 멍석을 연상시키는 직조 카펫, 가벽을 세워 마련한 봉당 구조와 봉창 등 초가집에서 모티브를 얻은 공간은 망형의 미학을 고스란히 품어내며 질박하면서도 견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부러 낮춘 조도는 아늑함을 더하는 동시에 회칠을 하지 않아 실내가 다소 어둡던 초가집의 실제 모습을 반영한 고증적 요소이기도 하다. 또 흙과 나무 등 자연의 따뜻함이 깃든 소재를 중심으로, 금속을 사용해도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에이징되는 아이템을 곳곳에 두어 공간을 완성했다.
“이 공간을 운영하면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전통문화라고 알려져온 많은 것이 사실 왕가나 반가의 생활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조선시대 민중의 삶을 바탕으로 구현한 로해의 모습에 의아함을 표하는 분도 종종 계시죠. 하지만 192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의 70~80%가 초가집이었다는 기록이 사진으로 남아 있어요. 이후 빠른 경제성장 과정에서 민중의 삶은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치부되며 흔적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사라져버린 것뿐입니다. 그 생활양식에도 나름의 질서와 지혜가 응축돼 있었고, 저는 충분한 연구를 바탕으로 지금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가치를 살펴보고자 했어요. 로해가 잊힌 전통 미학을 일상에서 새롭게 인식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결국 김동현 대표가 추구하는 것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접근이 아니다. 오히려 당시 존재했던 것을 지금의 생활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행위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전통의 ‘체화’가 이루어지고, 더 나아가 우리 생활에서 전통이 다시 발현되며 끊임없이 발생하는 ‘체현화(體現化)’라는 새로운 개념을 그는 강조한다.

차와 차를 둘러싼 사람과 공간, 그리고 조상들의 지혜와 문화가 하나의 종합예술로 응축되는 곳, 로해. 이곳의 궁극적 목표는 한국 차가 지닌 고유한 정체성과 그 주변의 생활양식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가치를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달하는 데 있다. “뚜렷한 정체성을 지닌 우리의 것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연구해보면 기록으로 남지 않은 우리 문화가 정말 많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활동을 가능한 한 모두 기록화하고 문서화하려고 합니다. 훗날 다음 세대, 또 그다음 세대가 ‘2020년대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어떤 문화를 만들었을까?’라고 물을 때, 로해를 통해 정리된 한국적 문화 콘텐츠를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