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만난 가장 매혹적인 장면들
과거의 유산은 어떻게 동시대의 풍경이 될까? 밀란 디자인 위크 2026에서 만난 가장 매혹적인 시노그래피.

디자인이 투숙하는 가상의 호텔, 닐루파 갤러리
밀란 디자인 위크의 터줏대감 니나 아샤르는 닐루파 디포 전시장 전체를 거대한 가상 호텔로 탈바꿈시켰다. 한때 은 제품 공장이던 전시장은 로비, 다이닝 룸, 흡연실, 펜트하우스 등 각각 기능을 갖춘 공간으로 거듭났다. 거친 산업 공간에 화려한 조명과 벨벳 소재, 조각적 가구를 배치해 마치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듯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현대 디자이너의 작품과 20세기 거장의 빈티지 피스를 각 객실의 테마에 맞춰 선보이고, 일본의 료칸을 재해석한 명상실도 마련했다.

궁전을 뒤덮은 아르데코의 향연, 루이 비통
루이 비통은 팔라초 세르벨로니 전체를 거대한 연극 무대로 연출했다. 전시의 핵심은 아르데코 거장 피에르 르그랭의 그래픽 언어와 오브제 노마드 컬렉션의 만남. 1920년대 기차 객실 테마의 입구를 지나면 에스투디오 캄파나와 로 에지스 등 세계적 디자이너의 신작이 강렬한 컬러의 전시실과 어우러지며 조각처럼 나타난다. 중정에는 르그랭의 북바인딩 패턴을 관람객이 거닐 수 있는 건축적 표면으로 확장한 대형 러그 설치물을 설치했다. 브레라 미술학교 학생들이 제작 및 설치에 직접 참여해 브랜드 정신과 전통 공예, 현대 예술 교육이 어우러진 장면을 완성했다.

한 장의 플래드로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로로피아나
로로피아나는 화려한 연출 대신 일상의 평범한 사물 하나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새로운 전시 포맷 ‘스터디스(Studies)’를 공개했다. 첫 번째 탐구 대상은 플래드. 전시장 내부에 다양한 형태로 설치한 나무 구조물에 24장의 플래드가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작품처럼 걸렸다. 관람객은 다채로운 패턴의 텍스타일을 직조 방식과 섬세한 표면 처리, 가장자리의 디테일까지 아주 가까이서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가공하지 않은 섬유와 원사 등을 배치해 완성된 결과물뿐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아름다움까지 함께 드러냈다.

빛으로 재탄생한 뉴룩, 디올 메종
디올은 프랑스 디자이너 노에 뒤쇼푸르-로랑스와 함께 새로운 조명 컬렉션 ‘코롤(Corolle)’을 공개했다. 이 컬렉션은 1947년 크리스챤 디올이 발표한 혁신적 ‘뉴룩’에서 출발한다. 잘록한 허리에서 풍성하게 퍼지는 실루엣의 코롤 스커트는 무라노 장인들의 손을 거쳐 부드러운 곡선과 우아한 주름이 어우러진 조명으로 재해석됐다. 전시장 입구에서는 태국 작가 코라콧 아롬디와 바사나 사이마가 천연 야자 섬유로 조성한 대형 설치 공간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내추럴한 질감으로 완성한 이곳은 디올이 유년 시절을 보낸 그랑빌의 빌라 정원에서 영감을 얻었다.

빛의 공장으로 변신한 수도원, 이솝
이솝은 15세기 수도원 키에사 델 카르미네에서 브랜드 사상 첫 조명 컬렉션 ‘아포제(Aposē)’를 공개했다. 〈The Factory of Light〉는 밀란 도심 곳곳의 공사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계와 가림막을 활용해 마치 공사 중인 도시를 거니는 듯한 감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조명 브랜드 플로스와 협업한 이번 컬렉션은 이솝의 핸드 밤 튜브에서 영감을 얻은 형태에 유리와 황동을 더해 완성했다. 1만6000개의 이솝 갈색 병을 쌓아 만든 테이블 위 은은한 호박색 빛으로 둘러싸인 채 꼿꼿하게 서 있는 아포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성물처럼 보인다.

이탈리아 디자인 거장과의 조우, 토즈
토즈는 이탈리아 디자인의 황금기를 이끈 20세기 디자인 거장들의 시그너처를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소환했다. 〈Icons by Icons〉는 조 콜롬보, 가에타노 페셰, 미켈레 데 루키, 카스틸리오니 형제의 상징적 작품을 고미노 슈즈에 투영한 프로젝트다. 오리지널 피스와 역사적 디자인을 재해석한 리미티드 에디션 슈즈를 나란히 배치해 장르를 넘나드는 대화를 이끌어냈다. 여기에 인하우스 장인의 핸드스티치 시연을 통해 신발이라는 익숙한 사물이 어떻게 아이코닉한 일상의 오브제로 완성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줬다.

공간의 좌표가 된 오브제, 에르메스
에르메스는 자극적인 시각 효과 대신 공간의 리듬과 재료의 본질에 집중했다. 건축가 샤를로트 마코 페렐만이 설계한 전시장에는 너도밤나무와 석고로 만든 30개의 기둥이 80cm부터 3m 높이로 솟아올랐다. 관람객은 높낮이가 다른 기둥 사이를 거닐다 그 위에 좌표처럼 놓인 홈 컬렉션을 발견하게 된다. 숫자 ‘8’ 모양의 상판에 경마장 트랙을 연상시키는 ‘스타디움 데르메스(Stadium d’Hermès)’ 테이블을 중심으로 망치로 두드려 질감을 살린 팔라듐 그릇, 말갈기와 가죽을 입힌 화병, 한국 보자기에서 영감을 받은 캐시미어 등 군데군데 배치한 오브제는 특유의 밀도 높은 장인정신을 담백하게 드러낸다.

가죽 덩굴 속에서 피어난 빛, 보테가 베네타
보테가 베네타는 비아 산탄드레아 매장에서 이광호 작가와 협업한 설치 작품 ‘Lightful’을 공개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루이즈 트로터와의 세 번째 협업으로, 브랜드의 상징인 인트레치아토의 미학을 공간 전체로 확장했다. 매장에 들어서면 초록색과 검은색 가죽끈이 거대한 덩굴처럼 천장에 매달려 있다. 이광호 작가는 하우스 아틀리에 장인들과 함께 보테가 베네타 특유의 부드러운 페투체 가죽을 손으로 엮어 그 과정부터 결과까지 오직 브랜드만을 위한 오브제를 완성했다. 바구니 형태의 가죽 틈새로 새어 나오는 LED 빛은 전통 공예와 현대적 감각이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순간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나무라는 우주, 델쿠르 컬렉션 & 콜렉시옹 파티큘리에르
델쿠르 컬렉션과 콜렉시옹 파티큘리에르는 나무라는 소재로 낼 수 있는 미감을 극대화했다. 먼저 델쿠르 컬렉션은 ‘파도를 새기다’라는 주제로 딱딱한 나무에 유연한 곡선을 입히는 실험을 보여줬다. 파도처럼 굽이치는 ‘ULI’ 소파와 공사 현장의 비계처럼 시원하게 뻗은 ‘BAY’ 책장 등 건축적 구조미가 돋보이는 가구가 주를 이뤘다. 콜렉시옹 파티큘리에르는 소재의 촉감과 사용자 간 ‘애착’에 집중했다. 나뭇결을 선명하게 살리는 전통 기법과 매끄러운 래커 마감을 대조시켜 보는 재미를 더하고, 장인정신이 깃든 ‘GIL’ 의자와 ‘JIA’ 책상 등을 통해 가구 하나가 공간에 주는 정서적 무게감을 전달했다.

5300년 미래에서 발굴한 크리스털 무덤, 바카라
바카라가 4년 만에 밀란 디자인 위크로 돌아왔다. 프랑스 아티스트 에마뉘엘 뤼시아니는 9세기 교회 건물을 SF 영화 속 한 장면으로 탈바꿈시켰다. 전시 〈Crystal Crypt〉는 고도의 장인정신이 사라져버린 서기 5300년, 미래 인류가 바카라의 잊힌 유산을 발굴한다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거칠고 날 선 브루탈리즘 양식 구조물 안에 1841년 나폴레옹 3세를 위해 제작한 ‘아르쿠르’와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위해 만든 ‘차르’ 같은 브랜드의 상징적 컬렉션이 고대 유물처럼 신비롭게 놓였다. 여기에 유리공예가의 몸짓을 무용으로 풀어낸 영상과 실제 공장의 소음으로 몰입감을 한층 끌어올렸다.

105년의 기억을 엮어 만든 정원, 구찌
고요한 산 심플리치아노 수도원이 구찌의 화려한 아카이브로 물들었다. 뎀나 바잘리아가 큐레이팅한 〈Gucci Memoria〉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부터 그의 데뷔 컬렉션 ‘프리마베라’까지 브랜드의 105년 역사를 장대한 서사시로 풀어낸 전시다. 회랑을 따라 펼쳐진 태피스트리 연작은 구찌오 구찌에 의한 시작부터 오늘날까지 시각적 진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브랜드 헤리티지에서 영감을 받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에서 구찌 자르디노의 음료를 제공하는 커스텀 자판기는 패션과 라이프스타일, 진중함과 캐주얼의 경계를 허무는 위트 있는 포인트다.

감각적인 갤러리로 거듭난 옛 금고, 디모레 스튜디오
디모레 스튜디오는 올해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디모레 갤러리라는 새로운 거점을 선보였다. 밀란 증권거래소 인근 옛 은행 건물을 개조한 공간으로, 전시의 핵심은 두 개의 지하 금고다. 각 금고는 디모레의 컬렉션과 빈티지 피스가 어우러진 몰입형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금고 사이를 잇는 좁은 복도는 밀란의 골목길을 연상시키며 전시에 긴장감을 더하고, 오산나 비스콘티의 브론즈 대나무 설치 작품을 예기치 못한 지점에 숨겨두어 미적 경험을 극대화했다. 드라마틱하지만 과도하지 않은 시노그래피 속에서 디모레 스튜디오 특유의 공간 연출력은 또 한번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