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순간, 남겨지는 사유
연출된 상황에서 비물질적 작업을 전개해온 티노 세갈. 기록도, 오브제도 남기지 않는 그의 작업은 관람객과 해석자가 함께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상황으로 펼쳐진다. 리움 컬렉션과 함께 약 25년에 걸친 작품 세계를 집약한 전시 〈티노 세갈〉을 통해, 예술과 삶이 만나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안한다.

물질적 결과를 남기기보다는 ‘연출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s)’을 중심으로 작업해왔어요. 이러한 관점으로 작업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나 이유가 있을까요? 시작은 단순했어요. 저는 1980년대에 독일 남서부 공업도시에서 자랐고, 사람들은 대부분 자동차나 컴퓨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했어요. 지구의 자원을 취해 기계로 제품을 생산하고, 소득으로 또 다른 물건을 사는 것이 ‘좋은 삶’을 의미하는 하나의 모델로 분명히 존재했죠. 그와 동시에 68운동 이후 세대의 학교 선생님들을 통해 지속 가능성 문제를 접하면서, ‘자원 집약적 물건을 안 만든다면 뭘 만들 수 있지?’라는 질문이 주요한 동력이 됐어요. 10대였던 저에게 소비 기반의 웰빙은 흥미롭지 않았기에, 소비보다 심리적으로 더 깊고 효과적인 가치를 만드는 방법을 찾고자 했어요. 우선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고 싶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고, 무용은 ‘다른 생산방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무용은 생산했다가 바로 사라지며 ‘탈생산’해요. 스스로를 지우는 거죠. 현대사회의 주축인 ‘서비스 경제’처럼, 자원을 소모하지 않고 인간의 움직임, 노래, 대화로 생산된 비물질적 작업을, 사물을 전시하는 미술관에서 선보이고자 한 것이 제 기본적 아이디어였어요.
연극이나 영화와 달리, 작가님의 작업에서 사람들은 작품과 경계 없이 함께 존재합니다. ‘경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4의 벽’이나 ‘정면성’이라 하죠. 연극이나 영화는 관객이 좌석에 앉아 무대와 스크린을 바라볼 뿐, 참여는 박수나 내면적 감각에 머뭅니다. 반면 제 작업은 연극이나 무용과 비슷하지만, 훨씬 열린 전시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관람객은 제약 없는 상황 속에 존재하죠. 객석 조명을 꺼서 관객이 사라져버리는 영화와 달리, 전시 관람객은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상황에 힘과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정치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은 우리 모두 어떠한 상황의 일부고, 각자 주체성(agency)을 가지고 기여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러한 구조를 작업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무용수처럼 상황을 알고 있는 해석자들과 일반 관람객의 주체성이 자유롭게 섞이는 ‘다공성(porosity)’에 관심이 있어요. 삶이란 대개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니까요.

작품은 기억과 관계 속에 남는데, 작가님에게 이 지속성은 ‘부재의 형태’에 가깝나요,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물질로 보시나요? 후자에 가까워요.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술관과 함께, 미술관을 위해 작업해요. 미술관은 하나의 아카이브로, 소장한 미술관이 존재하는 한 제 작품은 언제든 다시 보일 수 있습니다. 전시를 통해 작품은 일시적으로 물질화되고, 반복을 통해 시간 속에 존재하죠. 조각이 수장고 상자 안에 있을 때 ‘부재’하는 것처럼, 제 작품도 전시되지 않을 때는 부재할 뿐입니다. 하지만 작품을 보여주기로 결정하는 순간, 현존하게 되죠. 다만 어떤 작품은 조각처럼 물질적 실체로 존재하는 반면, 제 작품은 반복을 통해 계속 실연되며 존재해요. 또 하나 차이가 있다면, 시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과 각각의 위험이 다르죠. 제 작품은 50년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작품에 대한 지식이 사라져요. 하지만 수장고가 불타 작품이 파괴되거나 손상될 위험은 제 작품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제 작업은 결국 일종의 알고리즘이나 아이디어, 개념에 가깝기 때문에 그저 망각될 뿐이죠.
아이디어 구상부터 구현까지, 작업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창작 과정은 작품에 따라 달라요. 어떤 작품은 안무가처럼 디테일한 동작, 순서를 정교하게 설계하지만, 어떤 작품은 매우 개념적으로 접근하죠. 대개 머릿속 한편에서 수일 혹은 수년에 걸쳐 구상을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마무리 짓습니다. 종종 작품을 실제로 전시할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리허설을 해요. 대부분 스튜디오 리허설 없이 하기 때문에 꽤 개념적인 작업 방식이에요. 물론 연극이나 무용에서 하는 전통적 리허설을 통해 확인하기도 합니다.

‘해석자(interpreters)’와 함께 상황을 만들 때, 작가님이 설정한 요소와 부여한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작업에서 스포츠처럼 일종의 게임을 만들려고 해요. 스포츠를 보면 선수들이 규칙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주체성을 갖듯, 해석자들도 제가 만든 규칙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결과물은 복잡하게 유지하면서 창작은 단순하게 하는 방법이에요. 1시간짜리 안무를 기억하는 게 훨씬 어렵거든요. 중요한 것은 작품을 해석하는 사람은 항상 주체성이 있다는 거예요. 해석 과정에서 누군가가 뭔가를 하는 순간, 그건 항상 특정 방식으로 이뤄지거든요. 언제나 자기만의 풍미를 더해요. 그걸 막을 수는 없어요. 그런 점이 항상 풍요롭다고 느낍니다.
201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선보인 ‘This Progress’를 비롯해 ‘This Variation’, ‘This Success/This Failure’, ‘This is Technology’ 등 여러 작품에서 당대의 핵심적 개념을 다루셨어요. 최근 새롭게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나, 이전과 비교해 달라진 시각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작업을 시작한 당시엔 한국이나 독일 모두 ‘사물(object)’ 중심적이었는데, 지금은 ‘대인관계(interpersonal)’를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변했어요. ‘왜 우리는 서로의 관계에 집중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 제 초기 작업과 방향이 비슷해지긴 했는데, 나아가 ‘관계 맺기를 통한 서비스 경제’가 주축을 이루죠. 또 소셜 미디어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관계 과잉’의 사회로도 읽혀요. 하지만 소셜 미디어는 일종의 미장센을 소비하는 것일 뿐, 그 상황의 에너지에 실제로 동참하거나 주체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긴 어려워요. 다른 변화는 인터넷과 디지털 플랫폼이 만든 ‘관심 경제’의 도래예요. 과거 미술관과 신문이 중심을 이루던 구조가 변하며 미술관의 특권적 위상이 사라졌고, 전시와 미술관 안에서 작업하는 저에게도 그 역학 관계가 달라집니다. 과거에는 아티스트만이 공적 영역에서 창의적 소통을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고 공유할 수 있으니까요.

전시를 앞두고 기대하는 관람객들을 위해 힌트를 준다면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리움의 건축이에요. 장 누벨이 설계한 해체주의적이고 개방적인 공간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결정하는 핵심 요소죠. 8점의 출품작 중, 중앙 공간의 구조상 소리가 나는 작품들은 6주마다 교체해 세 작품을 나누어 선보일 예정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현대미술 소장품을 전시하는 장 누벨 건물의 특성을 고려해, 리움의 컬렉션과 함께합니다. 리움이 소장한 로댕의 조각과 제 작품 ‘Kiss’로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맥락을 제시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