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 골목에 들어선 박서보의 유산

오는 8월, 서울 아트 신의 이정표가 될 박서보미술관이 문을 연다. 이곳은 박서보 화백의 차남이자 박서보재단의 박승호 이사장, 대구 간송미술관과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 설계로 잘 알려진 최문규 건축가가 의기투합한 결과물이다. 거장 박서보의 작품 세계를 연구하는 동시에 후배 작가들의 세계 무대 진출을 돕겠다는 숭고한 목표가 이들을 하나로 묶었다. 박서보 화백과 박승호 이사장은 지인의 소개로 최문규 건축가를 만나 미술관 설계를 의뢰했다. 박서보재단 바로 곁에 자리한 미술관은 프리즈와 키아프가 열리는 9월 전 세계 아트 피플의 발길이 머무는 명소로 우뚝 설 것이다. 벌써부터 해외 아트 관계자의 문의가 이어지며 새로운 장면을 예고하는 이곳을 개관에 앞서 가장 먼저 들여다봤다.

현재 미술관 공사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나요? 공간 구성에 대해서도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최문규 현재 90% 이상 완공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건물이 완공됐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은 아니기에 다가오는 개관전에 맞춰 보다 세밀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공간은 지하 2층부터 지상 3층까지이며, 그중 지하 2층과 지상 2 · 3층이 전시장입니다. 총 3개 층이 전시장인 셈이고 저마다 다른 스타일을 갖게 될 것입니다.
박승호 바로 옆 박서보재단 건물과 더불어 박서보미술관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계획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저는 건물도 하나의 생명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박서보재단 건물만 해도 처음에는 부모님과 같이 살 집으로 설계한 것인데, 재단 사무실이 들어서고 점차 전시도 하는 공간이 되었죠. 박서보미술관과 재단이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 잡을지 기대해도 좋을 듯합니다.
대중을 위한 최고의 문화 공간이 미술관이라는 점에서, 미술관 건축은 건축가에게도 매우 특별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최문규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길 때 건축주로서 특별한 당부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박승호 미술관 옆 박서보재단 건물을 지을 때도 그랬지만 저는 건축가의 언어를 존중하기에 전적으로 설계를 일임하는 편입니다. 과거에도 저와 아버지는 재단을 설계한 조병수 건축가에게 박서보라는 작가의 예술 세계를 반영하길 바라기보다 자유로운 설계를 요청했죠. 이번에도 미술관이라는 용도에 대한 의견만 전했습니다. 다만 당초 목표는 아카이브 기록관 설립이었는데 최종적으로 미술관으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그에 따른 수정 과정은 있었습니다.
최문규 박서보 작가님을 여러 번 뵈었지만 아무런 말씀 없이 다 맡기겠다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한국에는 이런 개인 미술관이 드물기 때문에 좋은 취지에 공감하며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건축이 우선이 되기보다 미술 작품을 오롯이 잘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을 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층마다 전시 공간의 콘셉트가 다릅니다. 2층은 햇빛을 완전히 차단한 블랙 박스인 반면, 지하 2층 전시장은 정원을 품고 있습니다. 3층은 유글라스(U-glass)를 활용한 8m 높이의 정육면체 공간으로, 안산과 도시의 풍경을 함께 조망할 수 있는 점이 특히 매력적입니다.
도면으로만 보던 미술관이 멋진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완공을 앞둔 소감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박승호 공간이 기분 좋게 나이를 먹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건축가에게 전한 기억이 납니다. 보통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재료를 선호하지만,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떤 재료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이가 듭니다. 우리 미술관의 근간인 콘크리트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잘 드러내줄 것 같아 기대됩니다.
최문규 사용한 동판도 현재 초록빛을 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묘하게 부식되어 색깔이 변해갈 것입니다. 시간을 이해할 수 있는 아름다운 변화를 품게 되는 셈이죠. 건축물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게 짓는 것이 건축가로서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특히 이사장님과 논의해 행인들에게 최대한 넓은 길을 내주기 위해 미술관 위치를 4~5m 뒤로 잡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공공을 위한 미술관으로서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건축주의 생각을 명확히 전달하고 싶었죠. 하나의 미술관으로 인해 도시가 어떤 다른 풍경을 보여줄 수 있는지 체감하게 될 것입니다. 건물 자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큰 존재감을 가진 미술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술관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하이라이트는 어디라고 생각하는지요?
박승호 처음 설계 도면을 봤을 때는 3층의 8m 정방형 전시 공간이 굉장히 클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방문한 날엔 마침 날씨가 우중충해서 상상한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햇살 좋은 날 다시 와보니 마치 광명처럼 빛이 쏟아져 들어와 사방으로 흩어지더군요. 공간을 빛이 가득 채운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본래 전시 중에는 햇살을 차단할 계획이었으나 관람객도 이 아름다운 빛을 함께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이곳에서 햇살을 통해 빛을 발할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최문규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장식을 군더더기처럼 더하고 싶진 않았고, 현대미술관답게 담백함과 간결함을 추구했습니다. 박 화백께서 평소 자연에서 유래한 색감을 사용하셨기에 저도 자연의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공간으로 보면 박서보재단은 동서 방향으로 남향의 기다란 여름 정원을 품고 있습니다. 반면 미술관은 북향이라 가을 · 겨울 정원에 빗댈 수 있죠. 건축주가 조경에 조예가 깊은 점을 고려해 나무가 풍성하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이 입구에 펼쳐지도록 설계했습니다.
박서보재단은 이미 연희동의 문화적 거점입니다. 여기에 박서보미술관까지 가세하면 그 역할이 더욱 확장될 텐데, 두 분은 21세기 미술관이 과거와 어떻게 달라야 한다고 보는지요?
박승호 그간 재단 차원에서 연희동을 위한 문화 이벤트를 꾸준히 열어왔습니다. 미술관 개관 이후에는 삼청동이나 한남동처럼 지역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움직임을 상징할 수 있도록 연대와 협업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이미 연희동에는 20여 개의 갤러리와 여러 작가의 작업실이 자리 잡았죠. 우리 미술관은 무언가를 강하게 선언하거나 주장하는 장소보다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투명한 존재’가 되었으면 합니다. 동네 목욕탕이나 로마 시대의 작은 광장처럼 누구나 와서 편히 숨 쉴 수 있는 곳 말입니다. 그런 열린 공간을 만들기 위해 효율적인 운영 방식을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최문규 과거의 미술관이 권위적 건축으로 관람객을 압도했다면 오늘날의 미술관은 이사장님 말씀처럼 도시의 일상과 호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미술관이 골목 안쪽에 위치하면서도 결코 폐쇄적이지 않은, 연희동과 잘 어울리는 곳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소재나 컬러를 과도하게 사용해 소위 ‘잘난 척하는 공간’이 되지 않도록 경계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건축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 주인공은 그 안을 채울 콘텐츠니까요.
모두가 궁금해하는 개관전에 대해서도 살짝 귀띔해줄 수 있을까요?
박승호 아버지가 생전에 교류하셨던 작가 한 분과 공동 전시를 준비 중입니다. 그분 역시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중견 작가지만 아버지의 관점에서는 더 널리 알려져야 할 ‘젊은 작가’이기도 하죠. 아버지의 이름을 건 미술관의 첫 전시를 후배 작가와 함께 연다는 점이 미술관의 설립 취지와 잘 부합하는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아버지는 후배 작가 후원에 지대한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1970년대에는 신인 작가 발굴을 위해 〈Indépendants〉을 주도했고, 기성 작가들을 위해 〈École de Seoul〉을 기획했습니다. 또한 한국 여성작가들이 뛰어난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음을 안타까워한 아버지의 제안으로 〈한국 현대미술 20인의 여류전〉을 비롯해 여러 여성 화가의 전시가 잇따라 열렸습니다. 이번 개관전은 그런 아버지의 정신을 잇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다가오는 키아프 · 프리즈 서울 기간, 박서보미술관은 단연 시즌의 정점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술의 열기로 가득할 9월의 서울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은 어떤가요?
박승호 개관을 앞두고 시간이 다소 촉박하지만 그만큼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연희동은 이미 ‘연희아트페어’와 ‘연희커피페스티벌’을 자체 운영할 만큼 문화 자원이 풍부한 동네죠. 키아프 · 프리즈 서울 기간에 ‘연희 나이트’도 함께하는 풍경을 기분 좋게 상상해봅니다. 개인적으로 파티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파티를 만드는 일은 참 좋아하거든요.(웃음) 오는 개관전에서 반갑게 인사드리겠습니다.
최문규 파리국제대학촌 한국관과 서울대학교 의학 도서관 같은 공공 프로젝트를 연이어 맡으며 사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건축은 결국 그 공간을 쓰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주변에 대한 배려가 우선입니다. 휴관일에도 사람들이 야외 광장에 머물 수 있도록 대구 간송미술관을 설계했듯, 골목을 환하게 밝히는 박서보미술관 역시 연희동의 문화 거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미술관의 본질은 ‘전시’에 있습니다. 건축이 결코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되죠. 지난 3년간 공사 소음을 참고 이해해주신 주민들께 감사드리며 미술관 덕분에 서울이 더 좋아질 것 같다는 칭찬을 들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오는 9월 그 결실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