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에 깃든 아름다움 | Noblesse

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포용에 깃든 아름다움

ARTNOW
구글 선호 매체로 추가

구글 검색과 ai 답변에서
노블레스 닷컴을 우선적으로 보여줍니다.

형상을 덜어내며 이야기를 압축해온 박성소영의 회화는 서로 다른 세계를 감싸 안는 언어다. 작가가 이소영 컬렉터와 만난 자리에서 나눈 포용의 미학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박성소영 작가와 이소영 컬렉터의 만남

이소영
2023년 P21갤러리에서 선보인 전시 〈천산수몽〉부터 지켜봤습니다. 이번 〈산을 쌓고 백일몽을 꾸리라〉는 그 후 국내에서 오랜만에 여는 개인전이에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또 제목이나 전통적 주제들이 의도된 선택인지, 앞으로도 이어갈 계획인지 궁금합니다.

박성소영
오랫동안 베를린에서 활동하다가 2023년 P21 전시를 계기로 국내 활동을 다시 시작했어요. 그때는 의인화한 형상이 많이 등장했죠. 베를린에서 작업한 작품을 다수 선보이기도 했고요. 이후 몇 년간은 오히려 형상을 지워내는 데 집중했어요. 덜어냄에 대한 감각이 점점 깊어진 것 같아요. 제목과 주제는 모두 의도한 거예요. 이런 요소가
제 감수성과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비현실적 장면을 구현하기 위해 ‘몽’, 즉 꿈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있어요.

이소영
많은 작가가 해외 유학을 택하지만, 독일로 향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에요. 베를린으로 가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박성소영
20여 년 전, 이혼을 겪으면서 인생의 큰 변화를 맞이했어요. 서른 즈음이었는데, 세 달 정도 유럽을 여행하며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환기시키고 싶었죠. 그때 처음 베를린에 갔는데, 도시의 쓸쓸한 공기가 제 감정과 잘 맞았어요. 그렇게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죠. 사실 그전까지 미술을 공부한 적은 없었어요. ‘공부’라는 말이 맞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게 새로웠죠. 다만 인생이 한 번 크게 변할 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포트폴리오를 직접 만들어 대학 문을 두드리며 ‘나를 봐달라’고 여러 번 찾아갔어요. 그렇게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한국식 입시 과정을 거친 유학생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림이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예술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니까요. 저에게는 오로지 그 마음만 있었어요. 

11월 9일까지 P21에서 열린 박성소영 작가의 〈산을 쌓고 백일몽을 꾸리라〉전 전경

이소영
‘예술은 배우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는 말에 공감해요. 독일에서 경험한 자연과 한국에서 보고 자란 산수는 어떻게 다르다고 느끼나요? 그 차이가 작가님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궁금합니다.

박성소영
독일과 한국의 자연에는 다른 점이 참 많아요.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반면, 독일은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죠. 대신 독일의 자연은 훨씬 원시적이에요. 아주 가까운 곳에서도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만날 수 있어요. 작업실에서 몇 걸음만 나가도 가꾸지 않은 풍경이 펼쳐져요. 반면 한국의 자연은 정원이나 잔디처럼 잘 다듬어져 있어서 조금은 인공적인 느낌이 있죠. 제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안개와 물의 이미지는 독일의 풍경에서 비롯했어요. 그곳 작업실에서 밤새 작업하곤 했는데, 새벽이 가까워지면 자전거를 타고 근처 갈대밭으로 나가곤 했어요. 사람 하나 없는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부르는 해 뜨기 전 그 어스름 속에서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죠. 그 풍경을 볼 때마다 왠지 눈물이 났어요. 몇 번을 봐도 그렇더라고요.

천만 개의 수평선, 캔버스에 혼합 재료, 200×138cm, 2025
밤의 폭포, 캔버스에 혼합 재료, 90×80cm, 2022. 이소영 대표의 소장 작품
인어, 캔버스에 혼합 재료, 50×40cm, 2023~2025

이소영
감상자들이 작가님의 작품을 볼 때, 자연에 대해 작가님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길 바라나요? 혹은 그들의 태도나 인식에 어떤 변화가 있기를 바라나요?

박성소영
제가 그리는 것은 정확히 ‘자연’만은 아니에요. 자연은 제 작업에서 하나의 교집합에 가까운 존재예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닌 것들이 있잖아요. 에너지나 기운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보이지 않는 힘,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그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아직은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만큼 완전하게 담아내지 못하지만, 제 작업이 향하고 있는 방향만큼은 명확합니다.

무제, 캔버스에 혼합 재료, 50×40cm, 2025
카슈미르, 캔버스에 혼합 재료, 91×72.7cm, 2025

이소영
자연, 원시, 태고 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더하는 것이 인상적이에요. 작가님만의 방법이 있을까요?

박성소영
제가 그리는 그림은 시공간을 초월하지만, 결국 저는 지금을 사는 사람이니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현재’와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제 아버지가 동양화를 하셨어요. 생전에 작품을 한 점도 팔지 않으셨지만, 얇은 담요 하나 깔고 무릎을 웅크린 채 하루 종일 모란을 그리고 산수를 그리셨죠. 그 모습을 보며 자랐기에 손끝에서 전달되는 에너지가 얼마나 직접적인가, 그 에너지 덩어리가 그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버지의 영향이 제 작업에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색을 다양하게 써요. 풍경화에 흔히 쓰지 않는 보라색이나 핑크색, 또 은색도 자주 등장하죠. 은색은 특히 한국화에는 잘 쓰지 않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풍경을 만들 때 효과적이에요. 한복의 비단을 떠올려보면 제 색감이 좀 더 쉽게 이해될 거예요. 갑사의 색처럼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화면, 그 은빛의 변화가 제 그림의 특징이에요. 그렇게 제 작업에는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함께 스며 있습니다.

P21의 〈산을 쌓고 백일몽을 꾸리라〉전 전경
폭포, 캔버스에 혼합재료, 91×73cm, 2024

이소영
작품의 색채나 질감에서 ‘물–흐름’과 ‘고체–정지’ 같은 대비가 자주 보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느낌도 있어요.

박성소영
저는 우리 고유의 미학이 결국 ‘수용’과 ‘포용’에 있다고 생각해요. 좀 더 단순하게 말하면, 서양의 미술은 화려하고 동적인 반면 동양의 예술은 비움과 여백, 즉 덜어냄의 미학이 강하죠. 저는 동양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해외에서 살았기에 그 두 세계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듯해요. 작업할 때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싶었고, 그래서 더 절제되고 함축적인 언어를 쓰게 된 것 같고요. 떠오르는 영감을 오래 붙잡아두었다가 덜어내고 또 덜어내는 과정 속에서 화면이 완성됩니다. 요즘은 점점 ‘시인’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예전에 마크 브래드퍼드가 흑인이자 동성애자인 예술가로서 차별을 넘어 위로 올라가겠다는 이야기를 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요. 많은 사람이 그런 그가 멋지다고 느꼈겠지만, 저는 오히려 조금 불편했죠. 차별은 흑인뿐 아니라 아시아인에게도 존재하고, 그가 말한 태도는 오히려 또 다른 우월의식처럼 느껴졌거든요. 아마 제가 자연에서 영감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자연에는 차별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자연이야말로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더 다양하고, 섞이고,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짓밟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서로를 감싸 안고, 포용하는 것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고, 제 작업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소영
마지막으로, 작가님만의 작업 루틴이 있을까요?

박성소영
집과 작업실은 꼭 가까워야 해요. 자다가도 ‘지금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갈 수 있는 거리여야 하거든요. 영감은 예고 없이 찾아오니까요. 중요한 건 그 흐름을 계속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래야 언제든 받아낼 수 있죠. 슬럼프에 빠졌다고, 혹은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딴짓을 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잠들기 직전에 형태가 떠오를 때도 많아서, 메모장을 머리맡에 두고 자기도 해요. 결국 중요한 건 ‘어떻게든 작업을 하겠다’는 태도인 것 같아요.

너를 생각해, 캔버스에 유채, 50×40cm, 2024
2023년 P21에서 개최한 개인전 〈천산수몽〉 전경
  • 정송(아트 칼럼니스트)
  • 에디터 김수진 
  • 사진 안지섭(인물), 안천호(작품 · 전시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