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최재은의 시간
40여 년간 시간과 생명, 자연의 순환을 탐구해온 아티스트 최재은이 서울시립미술관에 새롭게 써 내려간 ‘약속’의 시간.

들풀이 흔들리는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고, 종이를 땅에 묻어 미생물의 시간을 기록하며, 오래된 땅과 사라진 생명의 흔적에서 세계 질서를 읽어내는 일. 최재은에게 예술은 거대한 제스처가 아니라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세계의 리듬을 발견하고 응답하는 방식에 가깝다. 작가는 지난 40여 년간 자연을 배경이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주체로 바라보고, 인간이 잊고 지낸 관계와 감각을 다시금 일깨워왔다. 작은 씨앗 하나와 바람의 떨림, 지층의 미세한 변화에 이르기까지 그는 ‘생명이 스스로를 구성하는 방식’에 주목하며, 그 움직임 속에서 존재의 구조를 읽어내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최재은의 작업 여정은 초기부터 생명과 시간의 구조를 조형 언어로 번역해온 과정이었다. 197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바나를 전수하는 소게츠에서 수학한 그는 식물이 잘리고 시들어가는 과정 자체에 내재된 시간성과 순환의 감각을 체화한다. 당시 소게츠 아트 센터는 데시가하라 히로시를 중심으로 일본 전위예술의 실험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장소였고, 이곳에서의 경험은 최재은에게 자연을 고정된 형상이 아닌 ‘변화하는 시간의 존재’로 인식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1985년, 스승 이사무 노구치가 설계한 실내 석조 정원 ‘천국’에 13톤의 젖은 흙을 덮고 씨앗을 뿌린 첫 작품 ‘대지’로 구체화된다. 공간에 흙을 들이고 풀이 자라나게 한 이 설치는 자연을 인간이 통제하는 대상이 아닌 스스로 리듬으로 움직이는 존재로 대하는 그의 태도를 분명히 드러낸 출발점이었다. 이후 본격화된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에서는 일본 화지를 땅속에 묻었다가 다시 꺼내 시간과 습도, 미생물 작용이 남긴 흔적을 하나의 조형적 지층으로 드러냈다. 인간의 개입을 벗어난 자연의 시간을 따라가며 그는 ‘시간을 드로잉하는 방식’을 구축해나갔다.
인류 기원의 조형 작업 ‘루시(Lucy)’는 이러한 시간에 대한 성찰을 인류학적 서사로 확장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다시 묻게 한다. 10년 넘게 이어온 ‘DMZ 프로젝트’에서는 분단의 땅 위에 생태와 경계, 회복의 질문을 던지며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지점을 기록하고, 이름 모를 들꽃을 수집하는 ‘야생화 프로젝트’는 늘 그곳에 있었지만 낯선 생명의 기원과 서사를 복원해 인간이 잊어버린 생태적 연대를 다시 호명한다. 최재은의 작품은 궁극적으로 자연이 인간 없이도 지속해온 세계 질서에 대한 경청이다. 그는 우리가 간과해온 시간의 두께, 생명과 생명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결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며, 인간이 세계와 맺어야 할 관계의 형태를 다시 묻는다. 12월 23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작된 대규모 개인전 <최재은: 약속>은 이 모든 여정과 질문을 하나의 서사로 모은 자리다. 일본 교토에서 생활하며 작업을 이어오다 전시를 앞두고 내한한 작가를 만나 이번 전시의 의미와 ‘약속’이라는 이름에 담아낸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최재은: 약속>은 작가님의 지난 작업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명하면서도 새로운 장을 여는 자리입니다. 한국 국립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을 앞둔 소감이 궁금합니다. 전시는 언제나 긴장과 흥분이 함께합니다. 세상이 제게 건넨 흔적을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고, 존재와 시간의 흐름을 감지해 제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축적된 흔적이 하나의 형태로 다시 환생하는 순간이기도 하고요. 늘 감사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 제목인 ‘약속’에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본래 존재하던 내재적 관계 회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셨습니다. 작가님이 규정하는 ‘약속’이란 무엇이며, 왜 지금 이 개념을 다시 불려와야 한다고 보시나요? 제게 ‘약속’은 이미 존재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던 관계를 다시 떠올리는 일입니다. 자연과 인간은 처음부터 분리된 적이 없고, 우리는 그 관계 안에서 태어나 살아왔으며, 결국 다시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문명은 그 연결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지요. 그래서 제가 말하는 ‘약속’은 단절 이후 다시 기억해야 할 관계 회복을 뜻합니다. 인간과 자연을 다시 하나의 세계로 바라보게 하는 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문명은 속도가 깊이를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기술은 빠르게 진보했지만, 그만큼 관계는 얕아지고 시간의 감각은 조각나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을 소진한 결과를 마주하고 있고, 다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약속’이라는 이름은 다시 불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루시, 오키나와의 백화된 산호,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 야생화 프로젝트, DMZ 프로젝트 등 다양한 작업이 하나의 큰 서사로 연결되는 듯합니다. 이 흐름을 엮는 데 어떤 원칙을 두셨나요? 이번 전시에서 제가 가장 중심에 둔 것은 ‘존재의 연속성’입니다. 제 작업은 시대와 장소, 물성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질문을 품고 있어요. ‘우리는 자연과 어떻게 다시 연결될 수 있는가?’, ‘생명을 감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어디에 서 있는가?’ 같은 거죠. 저는 이 질문들을 개별 사건으로 나누지 않고, 지구의 시간·생명의 시간·인간의 시간을 하나의 연속선으로 바라보고자 했어요. 루시는 인간의 기원을 묻고, 산호는 생명의 긴 흐름 속에 드러난 인간의 흔적을 보여주며,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는 땅과 미생물의 시간을 기록하지요. 이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짧은 시간의 존재인지 되돌아보고, 우리가 잊고 있던 생명의 시간을 다시 떠올릴 계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한편 제게 생명은 살아 있다는 것뿐 아니라 죽음과 변형, 순환과 상흔을 포함하는 개념이기도 해요. 백화된 산호, 썩어가는 와시, DMZ의 녹슨 철선 역시 확장된 생명의 일부로 다루죠. 더불어 작업 전반에서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무생물, 지상과 지하, 식물과 인간 등의 경계를 해체하려는 시도도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시간과 생명, 경계의 층위가 서로 얽히며 하나의 서사를 이루는 것이 이번 전시의 핵심입니다.
560점의 야생화를 수집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손꼽힙니다. 이름 모를 들풀들을 기록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감정이나 깨달음이 있었나요? 말 그대로 긴 여정이었고, 그 자체가 하나하나의 만남이었습니다. 기록되지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식물을 마주하는 경험은 늘 경이로웠습니다. 이번에 수집한 560점의 야생화는 6000만 년에서 2000만 년 전, 인류보다 훨씬 오래전에 태어난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식물이지만, 대부분 이름조차 알지 못한 채 지나쳐왔지요. 그러나 이 식물들은 약이 되고 음식이 되며 집이 되어, 오랜 시간 인간의 삶을 지탱해온 보이지 않는 동반자였습니다. 저는 이 식물들의 기원과 문화, 그리고 오늘날 생태적 역할을 다시 세상에 돌려놓고 싶었습니다. ‘왜 나는 이제야 이 존재들을 제대로 보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수없이 되뇌었고, 그 깨달음 속에서 과거 무심함에 대한 부끄러움과 함께 존재 하나하나에 대한 늦은 감사와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 역시 이번 전시에서 중요한 축을 이룹니다. 수십 년간 땅속에 묻혀 있던 작업을 다시 세상으로 꺼내는 순간, 어떤 생각과 감정을 경험하셨나요? 종이 위에 남겨진 얼룩과 파열, 침식과 발효의 흔적은 작품 이전에 지구가 오랫동안 써 내려온 편지를 잠시 빌려 읽는 행위처럼 느껴졌습니다. 인간의 의도가 사라진 자리에 미생물과 온도, 습기와 광물, 바람과 침묵이 함께 만들어낸 하나의 기록이었지요. 그래서 가장 먼저 다가온 감정은 ‘겸허함’이었습니다. 저는 단지 환경을 설정했을 뿐, 그다음은 시간 속 자연에 맡기는 작업이었으니까요. 그 순간은 지구의 느린 시간과 인간의 빠른 시간이 잠시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제 존재가 얼마나 미세한 틈에 놓여 있는지 깨달았고,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다시 돌려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겼지요. 이 감정은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지속∙순환∙책임∙약속의 서사입니다.
10년 넘게 이어온 ‘DMZ 프로젝트’는 ‘자연에 경계가 없다’는 메시지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이 프로젝트는 어떤 방식으로 진화하나요? ‘DMZ 프로젝트’를 통해 저는 경계를 국가 간 정치적 갈등 결과로만 보지 않기를 제안합니다. 분단의 상징인 DMZ는 동시에 70년간 인간의 간섭이 닿지 않으며 회복된 생태계의 장소이기도 하죠. 저는 이곳을 ‘국가가 만든 폐허’이자 ‘자연이 되찾은 성소’로 이해합니다. 이 프로젝트에 개인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생태 회복이 제도보다 오래 지속되는 시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후 위기와 생물 다양성 붕괴는 국경을 모르며, 그런 점에서 DMZ는 한반도를 넘어 지구 공동체가 함께 마주해야 할 생태적 질문을 던지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생태적 평화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개인의 감각과 작은 행동이 연결되는 방식이에요. 그것은 누구의 소유도, 특정 국가의 의제도 아닙니다. 생태적 평화는 정치가 아닌 감각에서 시작되며, 국경이 아닌 생명의 리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2025년에 발표한 ‘Nature Rules.net’을 통해 세상으로 향하고 있으며, 이번 전시를 통해 더 확장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교토에서 생활하며 작업을 이어오고 계십니다. 이 도시의 환경이 작가님의 사유와 작업 방식에 미치는 영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교토에서의 시간은 제 조형 언어를 다시 정렬하는 큰 축의 이동이라고 생각해요. 교토의 자연은 과장되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를 증명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오래 존재해온 자연이 있을 뿐이지요. 이러한 환경은 복잡한 해석을 벗겨내고 생명 그대로의 미묘한 결을 포착하게 하며, 사물의 구조와 시간성을 더 정제된 감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동시에 교토는 천년의 시간성이 중첩된 거대한 문화적 축적의 도시입니다. 일종의 지적 생태계라고 할까요. 이곳에서 작업하는 일은 제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생명’, ‘시간’이라는 관심과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를 마주할 관람객들이 무엇을 느끼고 돌아가길 바라시나요?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건네고 싶은 문장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관람객에게 제가 바라는 것은 즉각적 감동이나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아주 작은 틈, 그리고 그곳에서 시작되는 사유의 움직임입니다. 이번 전시의 모든 작업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잊혀진 내재적 관계, ‘원래 있던 연대의 감각’을 상기시키는 장치입니다. 루시, 산호, 땅속 종이, 야생화, DMZ의 철선까지 각각은 다른 시간과 문법을 지니지만 결국 제 세계의 일부로 연결됩니다. 관람객이 작품 앞에서 ‘나는 무엇과 연결되어 살아가는가?’, ‘무엇을 잊고 있었는가?’, ‘무엇을 다시 약속할 것인가?’ 하고 떠올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질문 하나가 관람객 안에서 자라나 일상 속 작은 변화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이번 전시가 바라는 ‘약속’의 완성이라고 믿습니다.






